주석

공민왕 16년에도 신돈이 공민왕이 아들이 없자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각 군(君)과 재상 및 관부들이 매일 차례로 齋를 올려 그 비용이 한정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대부의 부녀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비용도 누만에 달하였다고 하였다(『高麗史』 132, 辛旽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