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高麗史』 78, 食貨志 서문에 의하면, “叔季에는 失德으로 版籍이 분명치 않아 良民은 모두 巨室에 들어가고 田柴科는 폐하여져 私田이 되었다.”고 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