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이 죽산(竹山)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토착세력은 죽산 박씨(竹山朴氏)이다. 신라 말의 호족으로 삼한공신(三韓功臣)이었던 박기오(朴奇悟)는 태조를 섬겨 관계(官階)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고 죽산지역의 중요 토성이 되었다. 이들의 영향력은 현재 안성시 향토유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는 미륵당 오층석탑(彌勒堂五層石塔)에서 발견된 「영태이년명탑지석(永泰二年銘塔誌石)」(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역주 한국고대금석문』3)에 보이고 있다. 각 면에 보이는 내용을 보면 ①영태 2년(永泰二年) 병오(丙午) 3월 30일 박씨(朴氏)와 방서(芳序)·영문(令門) 두 승려가 먼저 한번 만들고자 한 것을 이루었다(측면). ②탑이 이루어진 영태 2년(永泰二年) 병오(丙午)로부터 탑을 고친 금년 순화 4년(淳化四年) 계사(癸巳) 정월 8일에 이르기까지 헤아리면 228년이다. 전에 처음 만든 이가 박씨(朴氏)이고, 이제 다시 고친 이도 박씨(朴氏)이니 연대는 비록 다르나 지금과 옛날이 자못 같구나. 더욱 단성(丹誠)을 다하여 거듭 보쭕(寶쭕)을 중수하였다. 장(匠)은 현곽 장로(玄霍長老)이며 조주(造主)는 박렴(朴廉)이다. (밑면)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영태(永泰) 2년(二年)은 766년(신라 혜공왕 2)에 해당한다. 곧 8세기 중반 죽산지역에 5층석탑이 세워졌는데, 이때 중심이 되었던 세력이 박씨였다. 그후 이 탑은 성종 12년에 해당하는 순화(淳化) 4년(993)에 다시 중수되었다. 그런데 당시 중심이 되었던 인물은 박렴(朴廉)으로 죽산 박씨가 아직도 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한편 944년(혜종 1)에 건립된 흥령사 징효대사 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에도 박기오(朴奇悟)를 비롯하여 기달(奇達) 원윤(元尹), 그리고 덕영(德榮) 사간(沙干), 제종(弟宗) 사간(沙干) 등이 등장하고 있어 8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죽산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죽산 박씨가 토착세력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