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일본측은 개화파 정부에게 이범진, 沈相薰 등과 연결되어 있던 춘천과 여주 의병의 세력이 성하기 전에 조기진압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춘천 의병은 아관파천 3일전인 2월 8일 친위대의 공격으로 해산당하고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이범진은 의병을 이용하는 방식 대신 러시아 공사와 군대의 후원아래 보부상과 공병대를 동원하여 임금의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마침내 2월 11일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