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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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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쯤(지역에 따라 12,000년) 마지막 빙하가 양극으로 물러가고 새로운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생활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사람들이 사냥꾼의 생활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움집을 짓고 강가나 바닷가 옆에 살았다는 것은 혁명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당시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살림을 꾸리면서 사람들은 점차 주변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다.

 

빙하가 물러가고 충적세(沖積世)가 시작되면서 지구를 덮고 있던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녹아 바다로 흘러들어가자, 바닷물 높이가 조금씩 올라가게 되었다. 이때에 서해 바다와 대한해협이 형성되어 지금과 같은 한반도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또한 지금부터 7,500~6,200년 전쯤의 기후극상기(climatic optimum) 때에는 바닷물의 높이가 급속히 상승하여 현재보다 높았던 때도 있었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사람들이 한곳에 오랫동안 터전을 잡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추위나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움집은 주로 바닷가나 큰 강의 언저리인 낮은 습지 또는 넓은 평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끔 언덕 비탈에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집의 바닥면은 항상 건조해야 하기 때문에 다짐을 하였으며 안산 오이도유적처럼 바닷가에 있거나 봉산 지탑리유적과 같이 낮은 언덕이 좋은 입지조건이 되기도 한다. 

 

집 모양은 원뿔 모양이 대부분이며, 크기는 20~30㎡가 많다. 집을 만든 과정은 먼저 움을 깊게 판 다음(깊이가 150㎝나 되는 것도 있음)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옆에는 풀을 엮어 지붕과 벽이 되게 하였던 것 같다. 집 안 가장자리에는 식량이나 연모를 넣어두는 저장구덩이가 있으며, 집 안의 온도를 적당히 하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집 가운데에 불을 피우는 시설을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연모는 앞 시기의 뗀석기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붙박이 생활과 다양한 생산활동을 하면서 기술이 좀더 발전됨에 따라, 차츰 돌을 갈아서 석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석기는 뗀석기보다 날카로운 날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주로 나무를 자르고 다듬을 때 사용하였던 도끼를 비롯하여 화살촉·끌 등을 만들었다.

 

신석기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토기의 제작이다. 토기는 음식물을 조리하고 담아두거나 곡식 열매를 저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토기는 찰흙에다 운모·석면·석영 등을 섞어서 만드는데 주로 700~800℃의 온도에서 구웠던 것 같다. 토기를 자세히 보면 생김새는 바닥이 대부분 둥글거나 뾰족하며, 점과 선을 새기거나 찍은 무늬가 있다. 이러한 무늬가 새겨진 토기를 빗살무늬토기라고 하며 신석기문화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변화하였다. 처음에는 토기의 입술부분에 띠를 덧붙인 덧띠무늬를 새기다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빗금무늬·점줄무늬·물고기 등뼈무늬 등을 새기게 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살림살이에는 농경을 비롯하여 사냥과 채집·물고기잡이·짐승 기르기 등이 있다. 농경은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먹거리가 부족하게 되자 생산량을 늘이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나온 신석기시대의 곡식은 일산 신도시지역에서 발굴된 볍씨를 비롯하여 봉산 지탑리유적의 피, 평양 남경유적의 조, 그리고 옥천 대천유적의 오곡 등이 있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 기술은 괭이·보습 같은 농기구에 따라 일정한 단계를 거친 것 같다. 사냥과 채집은 이 시기에도 먹거리를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 같으며, 앞 시기보다 방법이 크게 발전하였다.

 

유적에서 출토된 것을 보면 사냥을 할 때에는 활과 화살을 이용하였던 것 같고, 채집은 자연환경에 따라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쉬웠을 것이다.1)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주로 빗살무늬토기)을 찾은 곳은 약 350여 곳 정도이다. 이 지역은 대부분 대동강·한강유역 및 그 주변의 섬을 포함한 서해안 지역, 두만강을 비롯한 동해안 해변 옆의 동해안 지역,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섬지역의 남해안 지역이다. 그리고 최근 활발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중부와 남부 내륙지역에서도 신석기 관련 유적이 계속 보고되고 있어 앞으로 자료가 정리되면 그 분포관계는 상당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지역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세 차례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토기의 변천과정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처음으로 토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편평밑토기와 덧띠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전기, 빗살무늬토기가 주로 사용되던 중기,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만들어지고 바탕흙에 변화가 있던 후기로 구분된다.

 

여주지역에서는 아직까지 발굴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없다. 그러나 다른 시기의 발굴이나 지표조사 과정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어 앞으로의 조사를 기대하여 본다.

이 지역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지역은 여주시 연양동, 상동, 강천면 강천리, 점동면 흔암리 등이며, 이 가운데 연양동, 상동, 흔암리 등은 유적의 발굴과정에서 토기가 조사되었지만 관련 유구(遺構)는 나오지 않았다.

 

연양리유적에서 찾은 빗살무늬토기를 보면 토기의 겉면 색깔은 적갈색이나 검은색이고 바탕흙은 장석·석영·운모가 섞인 모래질 찰흙으로 다른 지역의 토기와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무늬는 폭이 좁고 깊게 파인 것, 얕고 폭이 넓은 것 등으로 섞여 있다. 무늬를 새긴 방법은, 무늬를 새긴 다음 마무리로 무늬새기개[施文具]를 살짝 들어서 그었던 것 같다.

여주지역의 지형으로 볼 때 다른 곳의 신석기유적과 비슷한 입지조건을 지닌 지역이 많아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기대된다. 대체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신석기유적은 해안이나 강 옆의 모래퇴적지대나 바로 이웃의 얕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이 지역의 남한강과 그 샛강 사이의 지형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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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예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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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