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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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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호는 묵사(默史)이다. 1921년 여주군 능서면 번도 마을에서 류기하의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일본 헌병들에 의해서 생가가 불타 가족 모두 양주군으로 이사하였으며 국민학교를 마칠 때까지 가난하게 지냈다. 서울과 청진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문과를 수학하고 귀국해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조선일보』에 「대원군」, 『사상계(思想界)』에 「조선총독부」 등의 역사소설을 쓰면서 그의 탁월한 문체는 빛을 발하였다. 당시의 역사소설이 야담인지 사록인지 아니면 소설인지 전혀 분간이 안 되는 상황에서, 그는 노령화된 독자들로 인해서 고정된 과거형의 타파를 앞장서며 역사소설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였다. 류주현의 창작활동은 대략 세 단계로 구분한다. 「번요(煩擾)의 거리」로 문단에 데뷔한 1948년부터 1950년대까지는 초기인데, 절제된 문장과 빈틈없는 구성을 통해 「일각 선생」, 「대양의 유산」 등을 발표하고 예술적 기교에 집착을 보였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중기로, 「장씨일가」, 「잃어버린 여정」, 「임진강」, 「6인 공화국」 등을 발표하였다. 자유당 독재정권의 붕괴와 4·19혁명의 성공에 따라, 예술적 형식을 갖추기 보다는 역사를 오도하고 선량한 민중을 기만하는 악에 대한 비판으로 작가 의식은 바뀌었다. 그리고 구호에만 그친 현실 고발 작품들에 비해서 완벽한 예술성으로 고발 문학이 가지는 취약점을 극복하고 문단에서 크게 성공한다. 1960년대 이후부터 말년까지는 후기로 「남한산성(중편)」을 시작으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총독부」와 「대원군」 등의 장편 역사소설을 선보여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생가가 있던 여주군 능서면 번도리와 여주박물관에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아시아 자유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한국출판문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소설가협회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후진 양성에도 이바지하였다. 1982년 돌아가 가남면 태평리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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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