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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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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우홍(遇鴻) 또는 자상(子相)이고, 호는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이며, 사호(賜號)는 예정(禮庭)이다. 민태호(閔台鎬)의 아들로 1874년(고종 11) 폭탄 테러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양오빠 민승호(閔昇鎬)와 그의 아들이 죽자 양자로 입양되어 죽동궁(竹洞宮)의 주인으로서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 노릇을 하였다. 187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조선 역사상 최연소인 19살의 나이로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 군무사당상, 별기군의 교련소당상으로 별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맡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대인 별기군은 급료나 피복 지급 등 모든 면에서 구식 군대보다 대우가 월등하였는데 이 차별 대우가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의 한 원인이 되었다. 민영익은 1883년 보빙사(報聘使)가 되어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럽을 경유하면서 서양 문물의 위력을 실감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인 1884년 12월 우정국(郵政局) 낙성식 축하연에 참석하였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만났다. 정변 중에 생부인 민태호가 죽었고 민영익 자신은 전신에 칼을 맞았으나 선교사 알렌의 치료 덕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한성부판윤, 병조판서를 지냈고 판의금부사, 선혜청당상 등을 역임하다가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 체결로 친일(親日) 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망명 중 오창석(吳昌碩)을 위시한 당시의 중국 문인들과 교유하던 민영익은 문인화가로서의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하였다. 민영익은 묵란(墨蘭)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그의 묵란은 진한 먹과 힘찬 필선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석파란(石坡蘭)과 쌍벽을 이루는 운미란(芸楣蘭)이라 불리면서 추사 김정희(金正喜) 이래 지나치게 사의적(私義的)이고 고답적(古踏的)인 화풍을 일변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민영익의 대표작인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는 난의 뿌리가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나라를 잃게 되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남송의 유민화가 정사초(鄭思肖)의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의 멸망으로 인한 민영익의 비참한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후 홍콩으로 망명지를 옮겼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묘는 가남읍 안금리에 있다.

□ 참고문헌 : 『고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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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