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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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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漢文)을 잠시 배운 것 이외에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소금, 과일 행상을 하며 생활하다가 경성스프링제작소와 일본정공(日本精工)에서 직공으로 근무했다. 1939년 말 경성콤그룹에 가입해서 활동하였다. 경성콤그룹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대중조직 건설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을 목적으로 김단야(金丹冶)·박헌영(朴憲永)·김삼룡(金三龍)·이관술(李觀述) 등이 중심이 되어 경성(京城)·함경도·경상도에서 활동한 조직이다. 이 시기 일제는 각종 전시(戰時) 통제기구와 악법을 만들어 조선 민중을 억압·통제했다. 또한 민족해방운동은 정파간의 대립 심화와 소그룹화 경향으로 인해 어려운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단야가 국내에 들어와 이순금(李順今) 등과 함께 1939년 4월경에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노동자·농민·학생의 조직화를 시도하고 지방의 각 조직들과 연계를 맺고 활동했다. 그리고 곧 재건될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때가 오면 도시 폭동 전술에 입각하여 일제를 전복하고 계급과 정파 등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세력을 결집하여 인민정부(人民政府)를 세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성콤그룹은 일제하 국내 운동자의 마지막 집결체이며 1945년 9월 11일에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 11월말 경 시작된 일제의 검거로 인해 지도부가 와해되었다. 그후 중견 지도자인 김재병(金在丙) 등이 다시 재건을 시도했지만 1941년 8월말 경 또다시 일제의 검거로 인해 다시 와해되었다. 최병희도 이때쯤 검거되어 194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 참고문헌 : 강만길·성대경 엮음, 1996,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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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