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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삼국의 각축과 골내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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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후반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며 지금의 예성강 이남 황해도지역까지 진출한 백제는 광개토왕이 즉위한 392년 이후 다시 수세적인 위치로 바뀐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전사 이후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불교의 수용과 태학의 설립, 율령의 반포 등을 통해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광개토왕은 이러한 기반을 토대로 대규모의 정복사업을 진행하였는데, 그 사실이 만주 집안에 있는 광개토왕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적극적으로 백제 공략에 나섰는데 당시 려·제 양군은 임진강 유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다시 396년 대규모의 원정을 통해 58개 성과 700여 촌을 공취하고 백제를 일시적이나마 고구려세력권에 편입시켜버렸다.1) 이에 궁지에 몰린 백제는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동맹국인 신라를 공격하였으나(399) 고구려의 신라구원작전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백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고구려는 안정된 남방지역을 뒤로 하고 다시 서북방면으로 진출하여 후연(後燕)을 공격하고 요동·요서지방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복전쟁을 통해 광개토왕대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일대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광개토왕에 이어 즉위한 장수왕은 427년 평양 천도를 통하여 대내적인 체제정비와 남방 경영의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하에 대해 백제와 신라는 433년 나제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려 하였다.2) 당시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일정한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다. 즉 신라 실성왕과 눌지왕의 왕위계승에서 보듯이 왕위계승과정에 고구려의 간섭이 있었고,3) 또 「중원고구려비」에서 보듯이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4)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자립화를 추진하던 신라로서는 이러한 고구려의 내정간섭이 오히려 신라 발전에 장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고구려의 영향력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450년 신라가 실직원(悉直原 : 삼척)의 고구려 변장을 살해하는 사건을5) 계기로 두 나라는 그 동안의 동맹관계를 깨고 긴장 대립관계로 접어들게 되면서 이후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한편 460년대 이후 서북변의 북연이 멸망하고 고구려와 북위간의 교섭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고구려는 다시 남하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시달리던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를 보내 고구려 정벌을 위한 청병외교를 펼치게 되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고구려는 475년 3만 명의 병력으로 백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참수하였다.

 

475년 한성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왕도 한성을 빼앗긴 이후 고구려는 한강 전지역을 포함하여 죽령·조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판도를 넓히게 되었다. 475년 백제는 한성 함락으로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는데, 이때 여주지역도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중원고구려비6)나 최근 발굴조사되어 고구려 산성으로 확인된 청원 부강리 남성골산성을 통해7) 당시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충청지역 일대까지 남하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여주지역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은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지만 앞으로 조사가 진행된다면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 시기 여주지역은 고구려에 의해 영유되어 골내근현(骨乃斤縣)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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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