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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 출신의 청년 문사(文士)로서 1차 의병전쟁 때 경기도 일대에서 거의하였다가, 강릉을 중심으로 한 관동 9군 도창의소(關東九郡道倡義所) 의병진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고향인 여주에서는 창의할 때부터 여러 의병진과의 합동작전을 피하고 산악지대인 관동 방면으로 나가서 활동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는 당시 대소 봉기의 여러 의병진이 합동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의병의 세력으로 일본군의 큰 병력과 평지에서 대전하기란 어렵다는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관동 방면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장기 전투를 계획하였기 때문이다.
고향인 여주에서 거느렸던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중에 원주에 들러 상당수의 병력을 보충하여 평창(平昌)·진부(珍富)를 거쳐 대관령을 넘어서 건양 원년 1월 30일 강릉으로 들어갔다. 이후 이춘영·안승우 등이 원주에서 제천으로 들어갈 때에 박운서(朴雲瑞) 등에게 군사를 모집해 제천으로 오라 하였으나 민용호는 박운서의 요청을 거절하고 원주군사를 이끌고 강릉으로 향해 떠났다. 그 까닭은 당시 영동(嶺東)지역에 산재해 있던 곰과 호랑이 잡는 포수들을 모으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강릉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영동 방면의 의병들과 세력을 합하고, 산군(山郡) 지방의 포수들을 모집하여 영동 9군 도창의소를 설치하고 이병채(李秉採)·최중봉(崔重峰) 등 의병장들과 함께 부서를 정하고 포고문을 각 지방에 보내어 관동 방면의 의병세력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당시 강릉의 선비요, 의사의 한 사람인 소은(巢隱) 권인규(權仁圭)가 민용호에게 보낸 서신 중에 잘 나타나 있다. “장군은 소년 서생으로 오직 시서(詩書)를 외어 두고 예의를 강론하다가 불행한 시대를 만나서 왜놈이 악독을 부려 나라 형편이 위급하므로, 이에 문(文)을 버리고 무(武)에 나아가 남 먼저 의병을 일으켜 지휘가 당당하고 질서가 정연하여 저 용감한 무장들로 하여금 입이 벌어지고 기가 죽게 하니 어찌 그리 장하십니까? 오늘날 장군의 행동 여하에 따라 관동 9고을 수만 인명의 안위가 좌우되고 있습니다”라고 그의 활동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또 같은 시기의 호남 의병장이자 학자로 유명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은 서신 중에서 민용호에 대하여 “의거의 이름이 높았을 때에는 민용호 세 글자를 하늘 위의 사람처럼 쳐다보았소. 영중(嶺中)의 선비 친구들에게 물어 보아서 처음으로 20년 전의 예전에 알던 사람인 것을 알게 되니 우만(宇萬)에게도 이런 영광이 없겠소”라고 하여 그 활동을 기리었다.
강릉에서 들어와서 관동 9군 도창의소를 설치한 민용호는 관동 지방의 의병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오랫동안 산사냥을 직업으로 삼아오던 산포수들을 모집하여 자체의 실력을 충분히 한 다음 관북 방면으로 진출할 것을 계획하였다. 원래 거의의 목적이 일부 지역을 고수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닌 만큼 이번에는 관동 방면으로 병력을 몰고 관북 방면으로 들어가서 그곳의 의병들과 힘을 합하고, 다시 서북방면의 의사들과 연합하여 서울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원산(元山)에는 이른바 개항장이라고 하여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군사·경제적인 침략기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거에 그들을 축출하여 경내를 깨끗이 하자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일본 공사관의 정보망에 포착되기에 이르렀다. 즉 충청도 제천의 의병은 강릉의 의병과 연합하여 해변을 따라 통천(通川)을 경유 안변(安邊)에 진출하고, 춘천에서는 평강(平康)을 지나 덕원(德源)에, 북관(北關) 각지에서는 해안을 따라서 그들의 거류민지역인 원산을 습격하려고 한다는 등의 상세한 정보가 이미 일본 공사관 측에 흘러들어갔다.
이즈음 그가 지휘하는 관동의병의 주력부대는 3월 4일(음력 정월 21일)에 행군을 개시하여, 경기 의진에서 남한산성 실패가 있기 직전인 3월 19일(음력 2월 6일)에 함경도의 안변 선평(仙坪)에 도착하였다. 이에 민용호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러시아공사관에 보내었다. “… 아 슬픈 일입니다. 작년 8월의 변과 11월 16일의 화는 우리의 의관제도를 없이하고, 우리의 머리털을 자르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천지신명인들 어찌 크게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 의기의 인사들이 창의하여 토벌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러는 중에 지금 우리 황천자께서 귀진(貴陳)에 왕림하게 되었사오니 이 어찌 마른 수레 자국에 있는 고기에 물이 되며, 말라가는 움싹에 비가 내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 다행히도 태산 같은 은혜와 하해 같은 덕택을 드리워서 잔폐(殘廢)한 이 나라로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고 사직을 안정하게 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이는 당시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해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곧 공격을 감행할 원산에는 일본인 이외에도 다른 외국인들도 거류 왕래할 수 있는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의병의 활동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글을 보낸 것이다. 이와 동시에 원산에 거류하는 외국인들에게 대략 “지금 왜적을 토벌하는데 혹시라도 귀국인을 경동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의미의 말을 첨가하였다. 행여 일본인 이외에 다른 나라와의 갈등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민용호 등의 원산 진격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미 일제에 의해 포착되었으므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의 심정을 민용호는 뒷날 포유문(布諭文)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서 원산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 원통하다. 하늘이 국가를 부흥시키지 않으려는 것일까 … 2월 6일 눈·비가 밤새도록 퍼붓고 날이 밝자 아침을 먹는데 뜻밖에 변이 일어나서 온 진중이 놀라 무너지자 흩어져 도망치는 군사가 서울로 잇닿았다. 그래서 마침내 관동 진(鎭)·관(官)·부(府)에 몇백 년 전해온 무기와 몇만 금이 되는 요호(饒戶)의 전곡(錢穀)을 원산 항구로 실어가는 것을 보고 도망쳐 왔으니 그 죄악이 너무 크다.”
원산공격에 실패한 이후에는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서 영남 기타 각처 의병과 연락을 취하고 또 삼척·횡성 등지의 의병 세력을 모아서 재거(再擧)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6월초에는 고성(高城)·양양(襄陽) 등지를 점령하고 군수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고난은 없지 않았다. 관군의 공세는 점점 심해지고 탄약·화약·양곡 등 군용 물자는 부족한데 민중들은 의병 및 관군에 대한 공급에 시달려서 짐을 싸 떠나는 사람이 점차 늘어갔던 것이다.
당시 강원도 동해안의 농촌에는 요호(饒戶)는 몇 집 안 되고 나머지 대다수의 농가가 궁민(窮民)들인데 이들은 요호에서 군수품을 걷다 보니 불공평하다는 원성이 높았다. 사람들은 의병을 가리켜 “관동을 파말의 지경에 몰아넣는 백의적(白衣賊)”이라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같은 원성을 민용호 역시 모르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관동창의소 포유문을 발표하여 흔들리는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7월 8월중에는 의병의 중추 세력을 이루었던 제천의진이 낭패 일로를 걷고, 영남 방면의 의병진도 거의 붕괴되어 가자 당초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 믿었던 관동지방의 요해지도 이제는 수륙 양면으로 포위망에 쌓이게 되었다. 그동안 민용호는 다시 함경도 방면의 의병진과 연락하여 가면서 제2차 원산 공격을 계획기도 했지만 그 역시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이에 민용호는 8월 초에 민동식·성익현·차윤옥·권대형 등 관동창의소의 장령들과 함께 500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회양(淮陽)·금성(金城) 방면으로 나와 일대 소탕전을 전개하고, 그달 그믐께 산협을 따라 황해도 곡산 방면으로 들어와서 제2의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때에 그들은 오래전부터 작전 대상지로 삼았던 원산을 멀리 우회하여 북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원산의 적진지를 공격할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관동의병진은 경군의 조광현·유성원·이규갑 등 부대에게 추격을 당하여 오던 터이며, 회양군에서는 다시 중대장 김명환과의 전투로 일부 병력의 손실을 보았다. 따라서 민용호 대장은 숙원의 원산 진격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고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평강(平康)·이천의 산악 지대를 따라 심산유곡의 황해도 곡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경군의 추격은 끊이지 않았다. 뒤를 따르는 함은준(咸殷俊)의 경군 부대와의 격전이 곡산읍과 문성 2곳에서 잇따라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중 문성 싸움에서는 중군 민동식(閔東植)과 강릉 포군 영장(砲軍 領將) 김도근, 평강 포군 영장 이경보 등까지도 희생되는 큰 손실을 보게 되니 민용호의 의진은 부득이 다시 산악지대를 따라 평안도의 양덕(陽德)·맹산(孟山) 지방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의암 유인석의 제천의진이 양덕 지방을 지난 지 20여 일 후였다.
여기서 민용호는 그 지역에 흩어져 있던 일부 지방의병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암의 의진이 지난 직후였기 때문에 경군과 그 지방 관군들의 경계는 매우 삼엄하였다. 이러한 주위의 정세를 살핀 민용호는 최문환 등과 다시 방향을 바꾸어 함경도 쪽으로 향하여 9월초에 고원(高原)·영흥(永興)·정평(定平)을 거쳐 중순에는 함흥으로 들어가 관찰사 서리 김택수를 쫓아내고 함흥부를 차지하였는데, 이때 그의 병력은 200명가량이었다.
그러나 대세는 여기서도 그들의 장기주둔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동안 지방의 의병들을 모아 병력을 보충한 다음 다시 북쪽을 향하여 행군, 나중에는 강 건너 만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유인석 등의 중추 세력도 강을 건너가서 해산하게 되니, 평안도지역 의병의 활동도 종식되었다.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國民章)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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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