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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안(禮安), 호는 퇴암(退菴)이며 경기도 안성출신이다. 이상훈(相勳)의 아들이며, 이상유에게 입양되었다. 판관으로서 1888년(고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관원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응교의 직위에 있으면서 옥당(玉堂)의 연차(聯箚)를 주도하였고, 1890년 규장각직각·시강원 겸 문학 등을 지냈다. 1891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이해 증광문과의 초시 시관을 맡은 뒤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진하시급좌당수하시(陳賀時及坐堂受賀時)에 상례(相禮)로 참가하여 가자되었고,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나 그 뒤 직무상의 문제로 유배당하였다가 곧 방면되었다. 1894년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로 나가 세곡(稅穀)운송의 업무를 맡아보다가 갑오개혁으로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지자 면직되었다. 이듬해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전국이 23부(府)로 편성되면서 진주부 관찰사에 임명되고 주임관 2등이 주어졌으며, 곧 이어 왕후궁대부로 칙임관 4등에 서임되었고 내각총서도 지냈다. 이해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하여 인산(因山) 때에 종척집사(宗戚執事)를 맡았다. 1896년 명성황후의 혼전향관(魂殿享官)에 임명되어 가자되었고 경상북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1898년 중추원일등의관으로 칙임관 3등이 주어졌으며, 왕아법오각국편의주찰겸리사사(往俄法墺各國便宜駐紮兼理使事)를 맡은 뒤 탁지부협판(度支部協辦)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평리원재판장에 기용되어 칙임관 2등이 주어지고, 1900년에는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를 역임하고 경상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지만 거듭된 사퇴의사로 면직되었다. 1903년 다시 경상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전라북도관찰사로 보직이 바뀌었으며, 탁지부의 계속된 업무보고 독촉에도 보고를 하지 않아 탁지부대신 이용익(李容翊)의 상주로 면관되었다. 다음해 내장원경·전라남도관찰사·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고 이어 궁내부 특진관을 지낸 뒤 경상남도 순찰사로 외직에 나갔으나 신병으로 김연식(金璉植)과 교체되었다. 1905년 궁내부특진관에 재임용되었으며, 왕명으로 복제(服制)를 개정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여 최익현(崔益鉉)과 전통적인 복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찰사 이도재(李道宰), 유학자 곽종석(郭宗錫) 등과 함께 그에게 보낸 최익현의 창의구국(倡義救國)을 역설하고 거사의 협력을 종용하는 서간을 받았으며, 곧 관직을 사퇴하고 여주에 낙향하여 민종식(閔宗植)·이시영(李始榮)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규합하기로 하고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의병명부를 압수당하여 많은 의병이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의 불찰을 깊이 후회하고 단식으로 자결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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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