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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기
여주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최영무(崔永武)·강두영(姜斗永)·원필희(元弼喜) 등과 함께 북내면 당우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 시위에 여주군이 호응하지 않아 서울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음을 알고, 4월1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하여 4월 5일 여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 테니 모두 참여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다시 원필희·이원문(李元文)·조경호(趙經鎬)와 함께 이원문의 집에서 만나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42매의 경고문을 작성하여 이 날 인근지역에 배부하였다.
4월 2일 자기집에서 강영조(姜永祚)·김학수(金學洙) 이원문과 다시 만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다음 날 장암리 이장 원도기(元道基)의 집에서 김학수·원필희 등과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최영무·강두영·강만길(姜萬吉)·최명용(崔明用) 등이 이웃 동리인 현암리 주민들에게 빨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도록 독촉 받고, 거사일자를 변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그도 당우리 공북학교로 가서 8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지휘하여 오학리(五鶴里)까지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하는 등,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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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