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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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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출신으로 1919년 당시 여주군 주내면(州內面) 상동리(上東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주지역에서는 아무 일 없이 극히 평온한 실정이었다. 그는 이에 분개하여 1919년 3월 26~27일 양일간에 걸쳐 동지 심승훈(沈承薰)을 찾아가서 거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적극적인 찬동을 얻은 다음에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이렇게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므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자”고 종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91,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9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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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