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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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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 북내면 오금리에 거주하던 최명용은 1919년 4월 3일 강두영·원필희·이원기·김학수·최영무 등과 함께 북내면 당우리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였다. 이 지역은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호응하지 않아 서울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함에 분개한 이원기 등이 여주 장날인 4월 5일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4월 1일부터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격문과 경고장,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3일 이웃 동리인 현암리 주민 5~6명이 와서 북내면장인 조석영이 일경에 잡혀 갔으니 구하러 가자는 말을 듣고 북내면사무소로 갔으나, 면장이 석방된 후였으므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강영두·강만길·최영무 등과 원래 계획을 변경하여 이날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그는 장암리·덕산리·외룡리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에 당우리 공북학교에 8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오학리까지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소위 보안법위반혐의로 징역 10월을 언도받았으나 공소하여 태 90도로 감형되었다.

□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84, 『독립운동사자료집』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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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