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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여주지역의 선종사원과 호족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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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는 한국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기였다. 고대사회가 무너지고 중세사회로의 변화과정에서 전제왕권은 몰락하고 진골귀족을 비롯한 지배체제가 점차 해체되어갔다. 특히 진성여왕 이후 신라 말기에 이르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증대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국가재정도 궁핍해갔다. 따라서 왕실을 비롯한 지배 귀족들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세를 독촉하게 되었다. 한편 농민들은 흉년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중에 조세의 독촉을 받게 되자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상주에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반란을 일으킨 이래, 죽주의 기훤(箕萱), 북원의 양길(梁吉), 경주 서부의 적과적(赤跨賊) 등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중에 견훤과 궁예는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여 신라와 정립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후삼국1)이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중앙귀족들은 정권 쟁탈전을 벌였고, 정치적 혼란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게 하였다. 따라서 지방에서는 중앙정부의 간섭이나 통제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세력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들 지방세력들을 흔히 ‘호족’2)이라고 부른다. 이들 호족세력들은 스스로 ‘성주(城主)’ 또는 ‘장군’이라 칭하며 사병을 거느리게 되었고, 그 지방의 행정을 장악하고 조세와 노동력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성주들 중에는 지방으로 몰락해 내려간 중앙귀족 출신도 있었다. 또 중앙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자들이 중앙정치의 혼란을 틈타 그곳에 눌러앉아 호족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오랜 동안 지방에 토착해서 살던 촌주(村主) 출신도 있었다. 이렇게 성장한 호족들은 실질적으로 군·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후삼국시대의 여주지역은 대체적으로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의 영향권 내에 있다가, 그 뒤를 이어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여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지방 세력가들이 존재하고 있었을텐데, 이렇다 할 호족세력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그 밖의 금석문에는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구체적인 호족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여주 혜목산(慧目山)에 있는 고달사지(高達寺址) 원종대사혜진탑비문(元宗大師慧眞塔碑文)3)을 통하여 어느 정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는 있을 듯싶다.

 

주지하다시피 신라 말에서 고려 건국기에는 각 지방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성행하였는데, 당시 선종 계통의 사원세력들은 대부분 그 지역의 지방세력들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 지방호족들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사상적으로도 무장되어갔다. 호족들은 주로 6두품 출신의 유학자나 선종 계통의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이들로부터 학문을 닦아 지방의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4) 여주 혜목산의 고달사는 선종(禪宗)계 대사찰이었을 뿐 아니라 신라 및 고려 왕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이곳에 주지를 하던 선승들의 활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지방호족의 활동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위치하며,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으나 최근에 발굴하여 당시의 사찰 규모라든가 불교사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인식되고 있다.5) 일설에는 고달사가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문헌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라 경문왕대에 활동한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과 관련된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경문왕이 현욱을 고달사에 머물게 하고 지원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욱이 고달사에 머문 시기는 대략 840년부터 869년까지 29년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달사는 원감대사 현욱이 주거하면서 크게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신라 왕실의 많은 지원을 받았다. 이후 그의 제자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가 거주하다가 김해의 봉림사로 이주하자, 다시 그의 제자인 원종대사 찬유(璨幽)가 거주하게 되고 봉림산문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찬유가 중국에 유학하자 한때 후원세력을 찾지 못하여 사세가 잠시 위축되었으나, 찬유가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다시 고달사에 머물면서 고려 왕실과 연결되고, 태조 왕건 이후 혜종·정종·광종의 후원 속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처럼 고달사는 신라 말기부터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크게 흥성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도 태조~광종대에 이르기까지 사세가 더욱 팽창되었다. 고달사 원종대사탑비의 건립 연대는 고려 975년(광종 26)이고, 비의 원 제액(題額)은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이다. 이제 이 비문를 통해서 여주 지방의 호족 및 선종 승려와의 관계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우선 이 비문에 보이는 원종대사의 출신을 살펴보면,

 

“대사의 속성은 김씨로 계림 하남인(河南人)이다. 손손저족(孫孫著族)이고, 대대명가(代代名家)이며, 조(祖)는 그 자취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고(考)는 드디어 집안을 일으켜 창부낭중(倉部郞中)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사현령(長沙縣令)이 되었다.”

 

원종대사의 성이 김씨이고 계림 하남인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그 선조가 신라 경주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또 ‘손손저족 대대명가(孫孫著族 代代名家)’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신분이 골품귀족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6두품 이상의 귀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현령은 사찬(沙湌)·급찬(級湌)의 관등에 해당하는 것으로 6두품 이상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선조 중 누군가부터 이 지방에 낙향하여 여러 대에 걸쳐 살면서 이곳의 호족세력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위의 비문을 통해서 대사의 활동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13세가 못 되어 출가하여 여주 혜목산의 종선화광(宗禪和光)으로부터 수학하였고, 22세에는 양주(楊州)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4세 때인 892년(진성여왕 6)에 당(唐)에 건너가 석두(石頭)의 법손인 자상화광(子祥和光)의 제자가 되었다. 30년간 그곳에 머물다가 921년(경명왕 5)에 귀국하여 삼랑사(三郞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 후 태조를 직접 찾아가 만나 보았으며 광주(廣州) 천왕사에 있다가 다시 혜목산으로 옮겨서 주지하였다. 태조 이후 혜종과 정종·광종을 거치는 동안 계속 고려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광종 때에는 국사로 봉해졌으며, 958년(광종 9) 9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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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