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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시대에는 군현 밑에 촌과는 별도로 향(鄕)·부곡(部曲)·소(所) 등의 특수행정조직을 두고 있었다. 촌에는 외관이 파견되지 않고 토착인인 촌장이 자치를 하였으며, 양인 신분의 촌민이 거주하였는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 촌과는 별도로 부곡을 비롯하여 향과 소라는 특별 행정구역이 있었다.
그런데 특수행정구역인 향·소·부곡·장·처의 형성과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매우 흥미로운 사료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여주목의 등신장(登神莊)조가 있다. 즉,
지금 고찰하여 보건대, 신라가 주군(州郡)을 설치할 때에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縣)이 될 만하지 못한 것에는 혹은 향(鄕)을 두고 혹은 부곡(部曲)을 설치하여 소재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는 또 소(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어서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탄소(炭所), 염소(鹽所), 묵소(墨所), 곽소(藿所), 자기소(瓷器所), 어량소(魚梁所), 강소(薑所)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각기 그 물건을 바쳤다. 또한 처(處) 및 장(莊)이라고 칭하는 것이 있어서 각기 궁전(宮殿)과 사원(寺院) 및 내장택(內莊宅)에 나뉘어 소속하여 그 세(稅)를 바쳤다. 위의 제소(諸所)에는 모두 토성이민(土姓吏民)이 있었다.1)
위의 기록에 의하면, 부곡과 향이 일반행정구역인 군현에 비해 토지, 즉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적어 현으로 만들 수 없는 곳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주민의 신분만이 달랐을 뿐 호구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어떤 곳은 일반 군현보다 호구가 많은 부곡이 있기도 하였고,2) 경우에 따라서는 군현에서 부곡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향과 부곡이 발생하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전쟁포로의 집단적인 수용이나 또는 본래 군현이었다 하더라도 반역 및 적에의 투항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강등되어 생겨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주민은 일반 군현에 비하여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은 예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종래는 향이나 부곡을 신분적인 면에서 천민집단으로 규정하고 거기에서 그 특성을 찾아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종래의 견해를 비판하고 ‘부곡인 양인설(部曲人良人說)’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아직 이렇다 할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향이나 부곡이 특수한 행정조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하겠다.3)
그동안 부곡을 비롯한 향·소의 주민을 천민으로 간주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이들의 발생 자체가 전쟁포로나 국가에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강등되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즉 향과 부곡민은 죄인이거나 혹은 그 같은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신분상 천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곳의 주민들은 일반 군현민들과는 달리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다는 사실이다. 즉 국학에의 입학이 금지되었고, 형벌상 노와 동등하게 취급되었으며, 자손의 귀속문제에 있어서 천인의 대우를 받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민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였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향이나 부곡민이 천민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며 설혹 천민설의 중요한 논거로 제시되고 있는 사료에 대해서도 해석상에 있어서 다른 견해를 내세워 그와 같은 논거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하지만 향과 부곡민의 양인설이 제기된 이후에도 귀향형(歸鄕刑)에 의한 유배지로서 향과 부곡이 이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그곳의 주민들은 종래의 주장대로 천민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어떻든 부곡은 고려후기에 들면서 점차 해방되어 일반 군현과 마찬가지 존재로 변질되고 있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부곡은 물론 향이나 소의 존재는 모두 소멸되었다. 따라서 문제는 이들 부곡을 비롯한 향과 소의 성격이 변질된 시기가 언제부터였는가 하는 점에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려 고려초기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사회변동이 크게 일어나고 군현제가 개편되는 무신정권기나 몽고침입 이후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듯싶다.
이상과 같이 향 부곡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론이 있긴 하지만, 일단 그 주민은 천민으로 보되 고려후기부터 점차 양인으로 변해갔다고 보고자 한다. 고려시대 여주에는 신내이소(新仍伊所)가 있었다.
한편 장·처는 왕실을 비롯하여 궁원이나 사원 등이 지배한 일종의 장원(莊園)이라고 할 수 있다. 여주에는 앞서 본 기사에서 본 것처럼, 등신장이 있었다. 또 방근곡처(防斤谷處)와 신제처(新堤處)가 있었다. 그 밖에 여주에는 역(驛)이 두 곳 있었다. 하나는 신진(新津)이고 다른 하나는 안평(安平)이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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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