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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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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능서면 왕대리 산 83-1
□ 시 대 : 조선
□ 지정사항 : 사적 제195호

영릉은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世宗)과 그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합장릉(合葬陵)이다.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돌아가시자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의 헌릉(獻陵, 태종의 능) 서쪽 언덕에 ‘동원이실(同陵異室, 능 하나에 석실 둘)’로 조성하고 오른쪽 석실(石室)은 세종의 수릉(壽陵, 생전에 미리 마련하는 왕의 능)으로 삼고 왼쪽에 소헌왕후를 먼저 안장하였다. 그리고 1450년(문종 원년) 세종이 승하(昇遐)하여 합장하니, 조선 최초의 합장릉(合葬陵)이 되었다. 영릉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치장조(治葬條)에 따라 조성한 것으로 조선 전기 능제(陵制)의 기본이 되었다. 병풍석(屛風石)중에서 영저(靈杵, 공이)·영탁(靈鐸, 방울)·지초(芝草) 문양을 제외하고 운채(雲彩)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여 조선 초기 왕릉의 병풍석 설치 규정을 완성하였으며 상석(床石) 밑의 고석(鼓石) 숫자를 5개에서 4개로 줄였다.

세조때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니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천장(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王者)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강력히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나 1469년(예종 1)에 결국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여주 서쪽의 북성산(北城山)으로 천릉(遷陵)하였다. 이때 석물과 신도비는 왕명에 따라 구릉(舊陵)에그대로 묻었다. 신릉(新陵)은 부역군(赴役軍) 5,000명 공장(工匠) 150명이 20여 일간 역사를 하였고 쌀 1,323석과 소금 41석이 소요되었다. 능은 세조 때부터 바뀐 능제(陵制)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설치하였으며 동자석(童子石)에 12방위를 새겼다. 또 봉분 안에도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으로 합장하고 상석 2좌를 마련하여 양위(兩位)임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능역에 포함된 충희공(忠僖公) 이인손(李仁孫, 1395~1463), 문렬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 1404~1459), 공조참판(工曹參判) 이사순(李師純) 등의 묘는 그 자손들과 협의하여 주변의 길지(吉地)를 사패지(賜牌地)로 내리고 이장(移葬)시켰다. 또한 천녕현(川寧縣)을 폐하고 여흥(驪興)으로 합쳐서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고을 이름을 여주(驪州)로 개명하였다. 이어 1472년(세종 9)에는 한강변의 천년고찰 신륵사(神勒寺)를 크게 중수한 후, 보은사(報恩寺)라 이름을 고치고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영릉은 능서면 왕대리 북성산의 서남쪽 구릉에 남동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이 망한 후 거의 관리가 이뤄지지 않다가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영릉 성역화 사업’ 지시로 인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영릉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는 세종의 어진(御眞)·기록화·천문기기·악기·인쇄기구 등의 유물이 전시된 세종전(世宗殿)이 있으며 우측에는 재실(齋室)과 세종대왕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주변의 잔디밭에는 실물을 모방해 만든 앙부일구(仰釜日晷, 해시계)·관천대(觀天臺)·측우기(測雨器) 등이 야외 전시되어 있어 참배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어 훈민문(訓民門)을 지나면 왼편에 큰 연못이 있고 정면으로 홍살문이 보이는데 그 안쪽의 아늑한 곳에 영릉이 자리 잡고 있다. 1772년(영조 48)에 개수한 정자각(丁字閣)에는 지금도 관광객들의 분향(焚香)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자각의 왼쪽에는 제물을 준비하던 수라간(水刺間)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의 영릉표(英陵表, 총높이 약 345㎝)를 보관하는 비각(碑閣)이 건립되어 있다. 영릉표는 천릉(遷陵)하고서도 한동안 세우지 않았고, 1673년(현종 14)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임금에게 건의하여 입석(立石)의 허락을 받은 후에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1745년(영조 21)에 와서야 건립되었다. 제왕(帝王)의 능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아도 능참봉(陵參奉)과 수호군(守護軍)이 있어 식별이 가능하다 하여 능표(陵表)를 세우지 않았던 것인데 송시열은 “국가 대사도 후일을 알 수 없는 것이므로 능표를 세우자”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회색 대리석의 비신(碑身, 높이 196㎝ 폭 80㎝ 두께 35㎝) 앞면에 큰 전자(篆字)로 “조선국(朝鮮國) 세종대왕(世宗大王) 영릉(英陵) 소헌왕후(昭憲王后) 부좌(祔左)”라고 쓴 후 뒷면에 총 9행의 음기(陰記)를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단정한 해서(楷書)로 기록하였다. 표제(表題, 표석음기의 제목)와 찬서자(撰書者)는 별도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일백십팔년(一百十八年) 을축(乙丑 1745) 립(立)”이다.

비각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바로 능침(陵寢)이 나타난다. 능역의 앞쪽에는 3단의 계체석(階砌石)을 설치하고 뒤쪽에는 곡장(曲墻)을 둘러 토사(土砂)의 유입을 방지하였으며 예종대(睿宗代)에 천릉하면서 새로 조성한 석물을 배설하였다. 봉분에는 난간석을 설치하고 주위에 석호(石虎, 높이 96㎝ 폭 56㎝ 두께 146㎝)와 석양(石羊, 높이 87㎝ 폭 56㎝ 두께 163㎝)을 각 2쌍씩 두어 나쁜 기운[邪氣]의 침입을 방지하였다. 그리고 봉분 앞으로 상석 2좌와 장명등(長明燈, 총높이 약 297㎝)을 놓았는데 각 상석에는 나어두(羅魚頭)가 장식된 고석(鼓石)이 4개씩 받치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8각 대석(臺石)을 갖춘 망주석(望柱石, 총높이 약 306.5㎝)이 세워져 있다. 또한 계체석 사이의 공간에는 복두공복(㡤頭公服)을 착용한 문인석(文人石, 높이 253㎝ 폭 90㎝ 두께 80㎝) 1쌍과 갑주(甲胄)를 걸치고 장검(長劍)을 땅에 꽂은 채 시립(侍立)하고 있는 무인석(武人石, 높이 248㎝ 폭 86㎝ 두께 84㎝) 1쌍이 석마(石馬, 높이 119㎝ 폭 58㎝ 두께 156㎝) 2쌍과 더불어 영릉을 호위하고 있다.

한편 구(舊) 영릉의 석물과 신도비는 1973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발굴하여 서울시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이때 발굴된 석물은 상석·장명등·문인석·무인석·석수(石獸)·망주석 등이다. 이중 석호(石虎) 1쌍은 영릉의 세종전 앞에서 전시중이며 또 1쌍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도비는 원래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발굴 당시에 귀부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雙龍爭珠)의 형상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비문은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지은 후 세종의 셋째 왕자이자 당대의 명필이던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비문을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도 올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땅에 매몰되어 있었던 관계로 지금은 마모가 극심하여 육안으로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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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