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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전경
□ 소재지 : 여주시 천송동 282
□ 지정사항 : 전통사찰
신륵사는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절 앞으로는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유유한 자태로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이 사찰은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창건 시기를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없는 상황이다.
신륵(神勒)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신기한 미륵(혹은 나옹선사, 혹은 인당대사)이 신기한 굴레(勒)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전한다. 흔히 용(龍)은 물속에 사는 것으로, 또 구름 속을 날며 비를 불러오기도 하는 물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전설의 동물로 이야기 된다. 용마가 출현하여 사납게 날뛰었다는 것은 곧 강물이 범람하여 휩쓸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용마가 출현했다는 마암(馬巖)의 역할이다. 이색(1328~1396)은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이 높다”고 하였고, 임원준(1423~1500)은 “마암은 강을 요긴한 곳에서 막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모두 사납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을 막아주는 마암의 역할을 칭송하고 있다. 만약 용마의 출현이 강물의 범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물을 막아주는 마암에서 용마가 출현했다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러나 한때 물길을 막아주는 마암의 구실에도 불구하고 강의 심한 범람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문에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에 의하여 지세(地勢)가 약한 곳에 절을 세워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신륵사를 창건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용마의 출현은 강이 홍수에 의해 범람되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따라서 용마를 제압했다는 것은 홍수로 인한 강물의 범람을 피하기 원하는 대중의 바람이 설화화했다는 견해이다.
신륵사가 유명해진 시기는 고려 말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즉 김수온(1409~1481)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 불우조(佛宇條)에서 “옛날 현릉의 왕사 나옹과 목은선생 두 사람이 서로 이어 와서 (신륵사에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드디어 기좌(畿左)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나옹과 신륵사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1376년(고려 우왕 2)에 나옹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옹 입적 후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색에게 선각탑명(禪覺塔銘)을 짓게 했다. 그리고 입적 3개월 후인 1376년 8월 15일에 나옹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륵사 북쪽 언덕에 나옹의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석종형의 부도를 세웠으며 동시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때의 중창이 신륵사의 골격을 분명히 한 계기일 것이다. 후에 조선시대에 또 한 번의 중창이 있었지만, 고려 말의 모습을 크게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가정해 본다면 지금 남아있는 극락보전과 좌우의 건물, 그 앞의 누각이 나옹 입적후의 중창 모습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 말의 신륵사에 관한 일로서 첨가할 일은 2층으로 된 대장각을 건립하고 대장경 일부를 봉안한 것이다. 이것은 1382년(우왕 8)의 일로, 도은 이숭인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조선시대 들어 신륵사는 영릉(英陵)의 원찰이 되면서 또 한 번의 중창의 기회를 맞게 된다. 본래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군으로 천장한 것이 예종 원년(1469)의 일이다. 곧 이어서 영릉의 원찰을 짓는 일이 거론되다가 한명회 등의 건의에 따라 가까이에 있는 신륵사를 원찰로 하여 중수하게 된 것이다. 중수공사는 1472년 2월부터 8개월간 진행되어 200칸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영릉을 원찰로 세우고자 처음 발원을 했던 것은 세조로서 그 유지를 계승하여 실현시킨 것은 당시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이다. 신륵사의 중수불사가 끝난 다음해 정희왕후는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신륵사의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게 하고 세종대왕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조선중기에는 임진·정유란의 병화로 피폐된 신륵사를 1671년(현종 12)과 1702년(숙종 28)에 여러 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 그리고 1726년(영조 2)에 동대(東臺)에 있는 전탑을 중수하고 중수비를 세웠다.
조선말기인 1858년(철종 9)에 신륵사는 헌종의 조모이며 익종의 어머니인 순원왕후가 발원하여 왕실의 내탕금으로 불전·종루 등을 중수하였다.
이후 1929년에는 주지승 성인(性仁)이 명부전을 중건하였고, 1955년에는 용주사의 말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신륵사의 각종 수리실적을 살펴보면 1980년에 다층전탑 보수와 조사당 고막이보수·기단보수를 하였고, 1981년 대장각기비 신축, 1982년 조사당 번와 보수, 벽체 보수, 1988년 소화전 및 격납함을 설치하였다. 한편 매표소 바로 지나 서 있는 높이 3.05m의 신륵사 사적비는 1985년 정무(주지승) 당시 세워진 비석이다. 전면에 신륵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후면에 효사상 고취를 위해 부모은중경을 조각하였다.
1990년대에는 1993년 일주문 보수, 1994년 매표소 이전 및 보호책 설치, 1996년 신륵사 조사당 진입로 정비 및 보수, 1997년 적묵당 보수, 극락보전·대장각·조사당의 방충방연재 도포를 실시하였고, 1998년 대장각비·종각·명부전의 지붕번와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2000년 심검당 보수공사, 2001년 화장실 보수공사, 소화시설 등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2003년에는 기존의 일주문은 헐고 원래 위치보다 전방 30m 앞에 새로운 일주문을 건립하였다. 기존 일주문은 정면 1칸, 폭 7.56m, 높이 10.9m의 규모였으나 새로운 일주문은 정면 1칸, 폭 4.5m, 높이 8m의 규모이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 다층전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대장각기비, 보제존자석등, 조사당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 팔각원당형석조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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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