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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분군의 축조집단에 관해서는 백제 혹은 고구려가 축조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고분의 구조가 횡구식으로 고관대를 설치하고 석침을 사용하였던 점, 금동관이 신라의 수지형대관으로 백제의 관식과는 다른 양식인 점, 신라 후기고분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철탁(鐵鐸)이 주변지역에서 확인된 점, 부가구연장경호(附加口緣長頸壺)·단각고배·컵형토기 등 신라계 토기가 출토된 점 등을 근거로 신라고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축조집단은 사민정책에 의해 이주당한 신라 혹은 가야인이 아니라 새로이 신라의 영토에 편입된 피정복민인 신민(新民)으로 파악된다. 이런 추측의 근거로는 묘제는 철저히 신라묘제를 따르지만 부장 토기 양상에서 백제계로 분류되는 평저호와 병형토기가 조합을 이루고 출토되는 양상과 유적의 입지가 저평한 구릉의 남사면에 형성된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신라의 점령지에 있던 재지민으로 백제문화를 기저로 하면서 새롭게 신라묘제를 강요당한 집단으로 파악된다.
이 고분군의 축조시기는 6세기 후반으로 편년하였다. 그 근거로는 신라의 여주지역 정복이 553년인 점과 이번 조사된 고분들의 양식이 신라의 횡구식 석실묘가 전부로 횡혈식 석실분이 전무한 점, 매장방식이 2인의 부부장을 기본으로 하는 점, 유물의 조합상과 그 편년이 6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하는 점 등을 들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신라의 영역이 된 것은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과 거의 동시기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상리·매룡리고분군의 축조순서와 관련하여 상리지역에서 횡혈식 석실분과 통일신라시대의 소형 석곽묘가 서쪽의 명불사 부근이 가장 먼저 축조되고 점차로 상리 쪽으로 고분축조가 이루어져 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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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