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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도입과 여주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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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성리학이 고려사회에 도입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 가운데 여주와 관련된 인물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이곡(李穀)·이색(李穡) 부자(父子), 김구용(金九容), 이집(李集)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면 주자성리학이 고려에 도입되던 당시의 상황을 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고려후기 불교계는 당시 보수적 경향을 보이던 불교교단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정혜결사나 백련결사와 같은 신앙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앙결사가 이룩하였던 불교정화운동은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귀족화, 보수화되어가면서 심각한 타락에 직면하였다. 특히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며 국가재정을 어렵게 만드는 폐단을 가져왔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한 사회의 지도이념으로서 누려온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를 대신할 새로운 사상의 도입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한 일부 유학자들은 원으로부터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의 보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성리학을 처음 전한 이로 안향(安珦)과 백이정(白頤正)을 들고 있다.

 

안향은 교육 진흥을 위하여 섬학전(贍學錢)과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신축하였고,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孔子)와 칠십자(七十子)의 화상(畵像)과 제기·악기·6경·제자사(諸子史)의 서적을 구해오게 하였다. 한편 백이정은 충렬왕 24년에 충선왕을 따라 원에 들어가 10여 년 간 머물면서 정주학(程朱學)을 배웠고, 귀국할 때는 관련서적을 많이 구하여 들어왔다. 그의 열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程朱學이 처음으로 중국에서 행해졌으나 東方에는 미치지 못했었는데, 頤正이 元에 머물면서 그것을 배워 가지고 돌아오니 李齊賢·朴忠佐가 제일 먼저 師受하였다. (『高麗史』 106, 白文節附 頤正傳)

 

백이정이 배워온 정주학은 이제현(李齊賢)과 박충좌(朴忠佐) 등에게 전수되었다. 특히 이제현은 28세 때인 충숙왕 원년에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원의 서울에 세운 만권당(萬卷堂)으로 가서 한족 출신인 요수(姚燧) 및 조맹부(趙孟頫)·오집(虞集) 등과 교유하면서 깊은 학술적 경륜을 쌓았다. 고려사회에 도입되어 점차 기반을 넓혀가던 성리학은 이제현의 문인이었던 이곡(李穀)·이색(李穡) 부자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곡은 충렬왕 말기에 지방 호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0세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20년(충렬왕 7)에 과거에 급제하여 복주사록참군(福州司錄參軍)에 임명되었다. 그는 뒤에 정동행성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원의 과거에도 급제하여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년 급제자들에 비하여 승진이 더디었는데, 그것은 그의 출신이 한미한 때문이었다.

 

이곡은 이제현이 지공거(知貢擧)로 있을 때 급제한 인연으로 그의 문도가 되어 사서편찬에 참여하였으며,1) 이제현의 추천을 받아 서연(書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곡은 이제현과 마찬가지로 원에서 새로운 성리학의 원리를 공부하고, 귀국한 뒤 이를 바탕으로 당시 고려가 안고 있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노력하였다. 이곡의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보면 유교의 기본 덕목 가운데 효와 충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효는 충보다 앞선 것으로 무엇보다 우선시하였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맹자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왕도정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도심(道心)을 확충하고 올바른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2)

 

이곡의 아들 이색 역시 성균시(成均試)에서 장원을 한 뒤에 원으로 가서 그곳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그가 여기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당시 원의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였기 때문이다. 이색은 원에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 공민왕 5년에 원의 관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여 시정에 대한 개혁안을 건의하고 정치개혁에 참여하였다. 그는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전선(銓選)을 회복시켰으며, 특히 성리학 진흥을 위하여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을 중영(重營)하였다.

 

성균관 중영(重營) 당시 이색은 개성부사로서 성균관대사성을 겸임하였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 ‘경술지사(經術之士)’를 선발하여 다른 관직을 가진 채 교관을 겸임시켰다. 이색은 학식을 변경하여 매일 명륜당에서 회합을 갖고 경서를 나누어 수업하였으며, 강의를 마친 뒤에는 서로 토론하였다. 그러면서도 피곤을 잊었으며, 이로 인하여 배우는 자들이 모여들어 서로 권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이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 성리학이 고려에 전래된 것은 그 이전이었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의 중영을 통한 이색과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여주와 관련이 깊은 김구용은 안동 김씨 김방경의 후손으로 권문세족의 기반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16세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외조부인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익재 이제현과 우곡(愚谷) 정이오(鄭以吾)에게도 사사를 받았다. 김구용은 『대학』에 특별히 밝았다고 하는데, 이색은 “경지(敬之 : 김구용)는 조용히 지내서 물건에 거스르지 않고 유교의 뜻에 맛을 들여 그 강령과 조목이 모두 『대학』에 있다고 하여 아침저녁으로 반복해 공부하고 조밀하게 실천하여 일에 순응하는 것이 한결같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칭송하였다. 김구용은 강릉도안렴사로 발탁되었고, 우왕 초년에는 북원(北元) 사절의 거절을 주장하다 이인임(李仁任)에 의하여 죽주(竹州)로 귀양갔다가 여주로 옮겨 거주하였다.

 

여주의 천령현에 은거하였던 이집 역시 이색, 김구용, 정몽주 등과 교류를 가지면서 성리학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이집은 충목왕 때 급제하였고 신돈 집권기에는 그를 비판하였다가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영천으로 피신하였다. 신돈이 제거된 뒤에 벼슬에 복귀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천령현으로 낙향하였다. 이집의 『둔촌유고(遁村遺稿)』에는 이색과 정몽주, 김구용 등에게 보낸 시편들이 많이 실려있다. 그리고 이색은 그의 「둔촌기(遁村記)」까지 지어주었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집도 성균관 중수 당시 이색이 선발하였던 ‘경술지사’의 일원으로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등과 함께 성리학 진흥을 위하여 활약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색, 김구용, 정몽주 등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성리학 진흥에 노력하는 한편으로 불교의 사회경제적 폐단과 이에 대한 대책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색은 공민왕 원년에 원으로부터 고려로 돌아오면서 다음과 같이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불씨(佛氏)가 중국으로 들어옴에 왕공(王公)과 사서(士庶)들이 존대하고 섬겨서 한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새로워지고 달마다 번성하였으며, 이에 우리 태조께서도 나라를 세움에 불사(佛寺)와 민거(民居)가 섞이고 얽히더니 중세 이후로 그 신도가 더욱 번성하여 오교(五敎) 양종(兩宗)이 이익의 소굴이 되고 냇가와 산굽이마다 절 아닌 곳이 없어, 다만 부토(浮屠)의 무리가 비루함에 물들 뿐 아니라 국가 백성들도 유식(遊食)함이 많아 식자들이 매양 마음아파하였습니다. 불(佛)은 대성인이오나 호오(好惡)가 반드시 사람들과 같을 것이니 어찌 돌아가신 망령(佛)도 그 신도의 이와 같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바라옵건대 명확한 조금(條禁)을 내리시어 이미 중이 된 자는 도첩을 주고, 도첩이 없는 자는 즉시 군오(軍伍)에 충당할 것이며, 새로 지은 절은 아울러 철거토록 하고 철거치 않을 시에는 수령을 죄주어 양민으로 하여금 모두가 중이 되지 못하게 하소서.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는 (佛을) 받들어 섬기는 정성이 열성보다 더욱 돈독하다 하시는데, 그 국조가 영원하시기를 비는 뜻은 심히 갸륵하고 아름답다 하겠으나, 그러나 신(臣)의 우견(愚見)으로 그윽이 생각건대 불(佛)은 지성(至聖)하고 지공(至公)하여 받드는 것이 극히 아름다워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대하는 것이 심히 박하여도 노하지 않거든, 하물며 그의 경전 중에 분명히 ‘공덕을 포시(布施)함이 지경(持經)에 미치지 못한다’는 설법이 있음이겠습니까(『고려사』 115, 이색전).

 

고려말기에 이르러 불교 사찰이 지나치게 많이 세워졌고 넓은 전지(田地)와 수많은 노비를 점유하였으며, 상업과 고리대업까지 행하였다. 이색이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당시는 “전국에 널려 있는 사원은 영리의 소굴이 되고, 승도는 불도의 본 취지와는 달리 이득만을 추구하여 비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백성들도 놀고 먹는 자가 많게 되었다.”고 하는 상태였다. 이색이 공민왕에게 건의한 내용의 핵심은 도첩제의 실시를 통하여 사찰의 남설과 승려수의 증가를 제한함으로써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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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