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흔암나루
  • 복사
  • 해당 서브 사이트명 qr코드

    모바일로 QR코드를 스캔하면
    이 페이지로 바로 접속 할 수있습니다.

□ 소재지 : 점동면 흔암리 흔바위마을 322 일대
□ 시 대 : 조선

점동면 흔암리의 흔바위마을에서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굴암리를 연결하던 나루이다. 나루가 위치한 마을이 흔바위마을이기 때문에 ‘흔바위나루’라고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치수급수리답사서(治水及水利踏査書)』에 따르면 흔암마을에 대해서 “흔암(欣巖, 별명 白巖)은 여주군 점동면 본류 좌안에 있으며, 호수가 64호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오지의 평야지대가 풍부하고 장호원 시장과 거래가 있으며, 또한 경성으로 향하는 도조미(賭租米)의 탁송량이 다량에 달해 물산의 집산량이 많다. 이입품으로 주요한 것은 1개년의 식염이 약 1,000석, 건어가 약 300태, 기타 잡화들이며, 이출하는 것으로 주요한 것은 백미 약 12,000석, 벼가 약 3,500석, 대두 약 150석, 소맥 약 105석 등이다. 선착 및 하역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떼배가 묵어가고 짐배가 정박하던 당시 주민들은 서울까지 220리, 충주 220리, 원주 80리, 장호원 40리, 여주 20리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사공들이 묵기도 했던 주막은 2곳 있었으며, 고리소주 또는 순배술, 즉 사발로 퍼주는 막걸리를 팔았다고 한다. 뗏목이 지나갈 때 아이들이 몰려와서 “돼지울이나 지어라” 하고 놀리면, 사공들은 “니 에미한테 가서 그래라” 하고 맞장구쳤다고 한다.

현재 흔바위마을은 1972년 홍수 때 가옥이 침수된 후 집단으로 이주하여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 취락은 강변에 인접해 있었다고 하는데, 이전부터 큰 홍수가 있을 때마다 가재도구를 옮겨야 했었다고 한다. 나루터는 소무봉 줄기의 산으로 상류 쪽이 가려져 있는데, 마을에서는 ‘안산’이라 부른다. 안산은 강변에 이르러 바위가 돌출해 있는데, 그 부근 수면 아래에는 ‘말등바우’, ‘눈치바우’ 등의 이름이 붙은 암반들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강변에 돌출한 안산의 암벽에 의하여 흔바위나루터는 급한 물살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으며, 홍수 때에도 물에 잠길 뿐 집이 떠내려가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쌀과 소금이 흔바위나루로 들어와서 마차를 이용하여 장호원으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흔바위나루는 이미 일제강점기 말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즉 1940년대 이후 흔바위나루는 여주장으로 가기 위한 교통수단 정도로 이용되었으며, 또한 마을 앞 남한강 중앙에 위치한 하중도의 경작을 위한 농선(農船)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이 섬에서는 흔암리와 굴암리 주민들이 대규모로 땅콩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2년 홍수로 인해 마을이 500m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였다. 이에 따라 과거 장호원으로 나가는 남서쪽 길(고살래고개~동마루)이 폐지되고, 마을 진입로도 마을 북쪽으로 신설되면서 흔암나루의 기능도 폐지되었다.

1972년 당시 나룻배는 1척이 있었으며, ‘만낮배(주낙배)’ 라고 하는 어부들의 고기잡이배가 1~2척 있었다고 한다. 나룻배를 이용하던 승객은 주로 굴암리와 흔암리 주민들이었는데, 굴암리에서는 여주장을 출입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흔암리 주민들은 땔나무를 하기 위하여 강을 건넜다. 굴암리에서는 여주나 점동면 소재지의 중학교를 통학하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공은 자주 나룻배를 타는 주민들에게서 1년에 보리 1말과 벼 1말을 받았는데, 이를 ‘모곡(募穀)’이라 했다고 한다. 식구 수에 따라서 모곡량은 다소 가감되었다고 한다.

나룻배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여름철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개치나루까지 나룻배를 끌고 가서 배를 타고 내려오는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배 앞에는 바가지 안에 불을 붙여서 띄워 보내면 마을사람들이 배가 도착할 때를 짐작하고 나루로 마중을 나와 기다리다가, 배가 나루에 도착하면 배에 싣고 갔던 음식을 내리고 나루터에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1970년경에는 마을 기금으로 돼지 한 마리를 잡고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를 즐겼다고 한다.

뱃놀이를 할 즈음에 마을 개천가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다. 1970년 당시까지도 흔암리의 가구는 약 60호였는데, 웃말과 아랫말로 나뉘어 승부를 겨뤘다고 한다.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여자들은 회초리로 상대편 남자들을 때리면서 줄당기는 것을 방해하였다고 한다. 줄은 반드시 상대편 동네의 것을 훔쳐서 꼬았으며, 줄다리기가 끝난 후에는 ‘액맥이’라 하여 개천에 버린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에는 인근 주민들이 찾아와서 같이 어울렸다고 한다.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문화예술과
  • 담당자 조원기
  • 연락처 031-887-3582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