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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참찬 조계생(趙啓生, ?~1438)의 졸기1)에 의하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1390년대 말경에 이천현 수령으로서 천령현감을 겸임한 바 있었다고 한다. 인접 군현 수령직의 겸임은 임시적으로 해당 군현이 혁파되었다거나, 수령관의 유고 등으로 인한 사고시에 취하는 조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천령현의 경우 행정적인 필요성, 또는 어떠한 사회적 사건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흥부의 서쪽에 자리한 천령현의 읍세(邑勢)는 이미 1438년(세종 20)에 호수가 5백 호가 찼으므로, 교도(敎導)를 둘 정도였다.2) 그리고 태종대에는 수참(水站)의 민호(民戶)인 참부(站夫)는 천령현의 경우 80명이었다. 이는 인근 지역인 양근 72명, 광주 75명에 비해 많은 숫자였다. 본래 경기지역은 총 325명의 참부(站夫)가 책정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천령현은 80명의 참부가 책정되어 있었다. 즉, 남한강 수계를 따라 1418년 당시까지 각각 천령 80명, 양근 72명, 광주 75명, 과천 46명, 금천(衿川) 52명이 군적(軍籍)에 올라 있었으며, 각 참의 수부는 각기 20명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경기북부지방에 해당하는 당시 경기우도(右道)의 수참(水站)은 조수(潮水)로 배가 가므로 역역(力役)이 가볍고 편하지만, 경기남부지역에 해당하는 경기좌도(京畿左道) 가운데 과천(果川) 흑석참(黑石站)에서 충주(忠州) 금천참(金遷站)에 이르기까지의 6참(六站)은 조전(漕轉)이 자못 많고, 또 왜객인(倭客人)이 왕래하여 사무가 많기 때문에 천령에서 금천까지는 매 참(站)마다 정군(正軍) 10명을 더 정하고 각각 봉족(奉足) 2명을 주어서, 1령(領)마다 15명으로 좌령(左領)·우령(右領)으로 나누어 입번하도록 하였다.3) 그리고 1445년(세종 27)에는 의정부의 주청으로, 천령 소로(小路)는 10결(結)의 공수위전(公須位田)을 보유4)할 수 있었다.
천령현의 경우, 영릉의 천릉에 의해 병합된 지역이다. 따라서 여흥도호부에 병합된 1469년(예종 1) 8월 8일은 천령현의 마지막 날이었음을 의미한다. 약 두 달 후에 “혁파(革罷)된 천령현(川寧縣)의 관사(官舍) 기지(基地)”는 당대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에게 하사5)되었다. 이에 한명회는 “천령현 관아 자리와 관사(官舍) 130칸을 스스로 점유하여 자신의 농사(農舍)로 삼”6)아 농장(農庄)을 경영하였다. 또한
“(천령 폐현의-필자 주) 인리(人吏)·아전(衙前)·관노비(官奴婢)들은 모두 여주에서 부리게 하니, 거리가 40여 리나 되어 한갓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며 일하기만 곤란할 뿐 아니라, 중간에 큰 내가 가로막혀 비가 오면 물이 넘쳐서 배를 띄울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공사(公事)로 인하여 왕래하는 사람들이 징벌(懲罰) 받을까 두려워하여 더러는 무자맥질하여 가고 더러는 헤엄쳐 가다가 잘못하여 빠져 죽은 사람이 10여 년 동안에 22명이나 되었다.7)
앞의 기사와 같이 천령현이 폐현이 되어 향리 등의 관속(官屬)이 40여 리나 되는 여주관아 까지 왕래해야 함에 따라 심지어 인명사고도 빈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폐현 거민(居民)들의 입장에서는 페현에 따른 읍치의 이동으로 행정적 처리를 위해 왕래하는 불편을 감수하여야 했다. 관부로서는 소송의 판결, 곡식의 수납과 방출, 병참의 지공8) 등의 부담 증가를 안게 되며, 조세의 수납이나 소송(訴訟) 등의 행정적 처리에 많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폐현의 거민들은 자연스럽게 공물이나 군역의 분정에 있어서 여주목 지역의 백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담세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위 기사에 대해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심하도다. 권신(權臣)이 후세에까지 해를 끼치고 백성에게 원망을 쌓게 함이여!”9)
조선시대에 강상(綱常)이나 반역죄 등과 같은 사회적 범죄와 연루된 출신 군현이 행정단위로서의 군현의 혁파대상이었음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이같은 이유로 혁파된 군현은 보통 10년 이내에 다시 복구됨도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천령현은 이러한 사회적 범죄와 무관한 천릉(遷陵)에 따라 여흥부의 읍세의 확장이 요구되어 혁파되었으므로, 혁파된 천령현을 복구하자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즉 1483년(성종 14) 8월에 여주목의 서남부에 인접한 음죽현의 박성근(朴成根)이란 자가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있어 그 처자를 관노로 삼고 처형한 일이 있었다. 이에 1488년(성종 19) 10월에 천령 폐현(廢縣)의 백성들이 음죽현을 혁파하여 여주목에 병합하는 대신 천령현을 복구하자고 신소(申訴)하였으나, 당시에는 한명회의 아내가 생존해 있다는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의견에 의해 복구되지 못하였었다.10) 그 이듬해 6월에 이 문제는 재론되었으나, 형조판서 김종직은 음죽현의 혁파와 천령현의 복구를 주장한 반면, 우찬성(右贊成) 손순효(孫舜孝)는 관사와 창고의 신축을 이유로 천령현의 복구에 반대11)함으로써 결국 천령현의 복구는 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1512년(중종 7) 7월에 천령 거민들이 상언(上言)하였으나, 10월에 호조의 반대로 인하여 천령현의 복구는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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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