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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향교 전경
조선왕조는 국가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지방민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향교를 설립하였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이미 외방 향교의 설치를 강조한 바 있었으며,1) 태종은 ‘수명학교(修明學校)’를 수령칠사(守令七事)의 하나로 파악하여 그 성과 여부에 따라 수령의 포폄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중앙에서 수령과 교수관을 파견하여 이들에게 향교의 설치와 향교 교육을 진흥시킬 책임을 지게 했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호를 비롯한 유지들도 향교 설치에 공헌하였다. 이렇게 국가적 차원에서 향교 설치를 독려한 것은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조선은 중앙에는 성균관과 사학(四學)을, 지방에는 향교를 설립하여 성리학의 사회적 전파와 대민 교화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전기 각 지역에서 향교는 공자 등 성현에게 제사 지내는 교화기능, 학사를 중심으로 한 교육기능 등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정부는 향교의 강당과 학사의 건립을 지원하고 교관을 파견하였으며, 교재를 간행 지급하고 학전(學田)을 마련해 주는 등 향교의 건립과 운영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향교는 문묘·명륜당·재(齋)를 둔 성균관의 축소된 형태를 갖추었으며, 각 주현이 관할하는 관학으로서 독립된 지방 교육기관이었다.
여주향교는 고려말 1391년(공양왕 3)에 상리 마암(馬巖) 기슭에 문묘(文廟)와 명륜당(明倫堂)을 짓고 유생을 가르쳐오다가, 임진왜란으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이끄는 왜병과 여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그 후 1601년(선조 34)에 옛터에 그대로 건립하였으나 50여 년만에 지붕이 상하고 재목이 훼손되어 1651년(효종 2)에 위치를 여주읍 홍문리 잣나무고개[栢木峴]로 옮겼으나, 향교가 들어선 이후 마을 주민들에게 나쁜 일이 계속 생기고, 또 지세도 상서롭지 못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1685년(숙종 11) 5월에 향교를 이건(移建)하자는 유생들의 의견을 모아 현 여주읍 교리(향교말) 261-1번지로 옮겨 이듬해 1월 5일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약 4개월만에 완공하였다. 당시 건축에 소요되는 역군(役軍)의 식량과 비용은 백미(白米)로 갹출하였는데 신분에 따라 3등분하였다. 즉, 양반과 중인은 각각 1두(斗) 5승(升)씩, 양인(良人)은 1두씩, 천인(賤人)은 5승씩 갹출하도록 하고, 역군은 각 호(戶)에서 번갈아 부역하도록 한 결과 백미 298석(石), 소금 6석 3두, 새우젓 1석 4두를 재원으로 마련하였다. 재목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쓰고 부족한 재목은 사대부가의 산에서 벌목하도록 하여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여주향교는 앞쪽에는 강학(講學)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뒤쪽 높은 곳에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향교 건축양식이다. 현재의 건물은 대성전의 경우 정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 양식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 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5칸 옆면 3칸 규모이다. 그리고 향교 생도들이 기숙하는 동무·서무가 있으며, 내·외삼문과 홍살문, 교직사(校直舍)로 구성되어 있다.2)
여주향교는 종6품의 유학교수관이 1원(員)이 파견되어 생도를 지도하였으며, 생도인 교생은 90명이 정원이었다.3) 향교 생도들은 사서(四書) 오경(五經) 이외에 『소학(小學)』·『성리대전(性理大全)』 및 『삼강행실(三綱行實)』 등 초등교과서와 『근사록(近思錄)』·『가례(家禮)』 등 유학서, 『통감(通鑑)』 등의 역사서, 『문선(文選)』·『고문진보(古文眞寶)』 등의 문학서 등을 학습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 등 제자백사서는 금서로 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특히 『소학』·『가례』와 사서오경이 주된 교과였다.
여주는 또한 역대 국왕의 영릉(英陵) 행행(行幸)시에 유숙하는 곳이었으므로, 여주향교는 국왕이 직접 친시(親試)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490년(성종 21) 9월 국왕의 거둥으로 인하여 “여주·이천향교에 각각 쌀 30석을, 용인향교에는 20석”을 하사하여 유생들의 학과를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는 한편,4) 아울러 이천과 여주에서 각각 생원(生員)을 시취(試取)하여 여주에서 3인이, 이천에서는 1인이 입격하였다. 이는 국왕의 거둥에 유생들이 지영(祗迎)한 것에 대한 국왕의 배려였다.
또한 1528년(중종 23) 9월에는 영릉 참배를 앞두고 시취(試取)와 응방(應榜) 및 여주향교 대성전의 치제(致祭)에 관해 논의5)하였는데, 그 결과 여주향교에는 관원을 보내 치제하고, 또 시제(試題)를 내어 제술(製述)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무재(武才)를 시취하도록 전교(傳敎)6)하였다. 이에 따라 여주 및 인근의 용인·이천·양지·광주·과천 등 6개 군현의 시취 대상 유생은 240명7)이었으며, 10월 14일에 중종의 거둥을 지영한 여주의 유생은 50여 명이었다. 이에 다음날 여주와 이천향교에는 각각 30석(石), 용인향교에는 20석을 하사하도록 하였으며, 우부승지로 하여금 여주향교의 교관과 교생에게 공궤(供饋)하도록 하였다.8)
한편 16세기 전반 기묘사화로 인하여 피화(被禍)되어 이천을 거쳐 여주에 은거하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지은 「여주 교생 가요(驪州校生歌謠)」9)는 다음과 같다.
- 여주 교생 가요(驪州校生歌謠)
- 심학(心學)의 연원은 성문(聖門)에서 나왔는데
- 淵源心學聖門中
- 태산(泰山) 북두(北斗) 높은 이름 일대(一代)의 종사(宗師)로다
- 山斗高名一代宗
- 육경(六經)의 왕도정치는 공자를 숭모하고
- 六籍談王希孔氏
- 이남(二南)의 선화(宣化)는 주공(周公)을 계승했네
- 二南宣化繼姬公
- 여강(驪江)에 벗 불러 맑은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즐기고
- 驪江喚作淸沂浴
- 빈관(賓館)에서도 마땅히 무우풍(舞雩風) 쏘여야지
- 賓館應當舞雩風
- 옹용(雍容)한 현가(絃歌)야 바랄 수 없지만,
- 鏗瑟雍容非敢望
-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운치[詠歸]10)야 여러 교생들에게 뒤질손가.
- 詠歸寧得後諸童
김안국은 이 시에서 여주향교 교생(校生)들의 학문 진작을 위한 그의 바램을 담고 있다. 김안국은 기묘사화 이전 경상감사 재직 시절에 도내 66개 주현의 향교에 반드시 가서 참배하고는 학도들에게 『소학(小學)』을 권학(勸學)하는 시를 지어 강당에다 현판(懸板)해서 학도들을 면려(勉勵)하기도 하였다.11) 이러한 교생들에 대한 권학은 그가 여주에서의 퇴거(退居)시기에 지은 「여주 교생 가요」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향교의 교육기능은 조선중기로 접어들면서 국가의 경비지원 의지가 약화되자 교생의 낙강정군(落講定軍), 향교 교관의 질적 저하 등으로 인하여 양반들이 점차 외면함에 따라 그 기능이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또한 여주향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 때에 화재로 소실되어, 근 백년간 여주의 관학교육은 저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란(兩亂)이 지난 후에는 향교교육의 질적 저하와 함께 경제적 지원의 취약성으로 인하여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조선중기 이후 서원의 급속한 성장은 향교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점차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향교는 삭망 알성례, 춘추 석전제 등의 제향기능과 향약(鄕約) 및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주관 등 유교이념의 보급과 보존에 있어서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으며, 향반(鄕班)들의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여주향교는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향교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유도회(儒道會)는 1957년 창립되어 춘추 문묘의 봉행과 삭망 봉향, 효자·효부의 발굴 및 표창, 충효도의 선양 교육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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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