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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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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단지 여러 금석문과 후대의 문헌에서 통일신라 말에 사찰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 광종대에 원종대사가 주석하면서 사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고달사지 출토 자기류 중 고려자기가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고려백자편이 상당 수량 출토되었는데 제작시기는 10~11세기로 편년된다. 보고자는 용인 서리 고려백자요지를 생산지로 추정하였다.1)

한편 고달사의 남동쪽에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요지가 위치하는데, 두 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해무리굽 완·발·화형접시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이 두 유적은 거리상으로 볼 때 수급이 용이하여 중암리 고려백자요지와의 관계를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고달사지 출토 고려자기류 중 79% 이상을 차지하는 고려청자의 경우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중암리·장암리 청자요지의 유물과 기형 및 번조방법 등에서 유사점이 확인된다. 여기서는 고달사지 출토 청자와 중암리나 장암리청자요지 출토품의 비교를 통해 그 유통관계를 파악해보겠다.

먼저 중암리와 장암리청자요지의 발류는 연록색이나 암록색을 띠고 몸체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굽과 이어진다. 굽은 내만하였고 접지면에 굵은 모래를 받쳐 번조하였다. 상감장식은 내면바닥에 중권문을 둔 후 상단에 여의두문대와 국화절지문을 배치하였다. 외면에는 저부에 중권문과 국화문을 백상감하였다. 이와 비교하여 고달사지 출토 발은 연록색을 띠며 완만한 사선을 그리며 굽에 이른다. 외면에 횡선이 돌려져 있고 내면에는 중권문과 바깥쪽에 여의두문대를 배치하고 국화절지문을 상감장식하였는데, 굽은 모래를 받쳐 번조하였다.2)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은 생산유적과 소비유적에서 동일하게 확인되는 수법이다. 이 외에 접시에서도 내면바닥에 여의두문대를 배치한 점, 몸체가 직립한 후 저부에서 내만하며 굽에 이르는 형태, 굽은 내만하였고 접지면에 모래가 붙어 있는 점 등3)에서 제작기법상의 유사점이 확인됨에 따라 상호유통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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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