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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운동과 여주 출신의 북벌진영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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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인조 23) 청에서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8년 만에 귀국한 봉림대군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조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인조 27) 5월 인조가 서거하자 봉림대군은 그 뒤를 이어 효종(孝宗)으로 등극하였다. 효종 즉위 초에는 조야를 막론하고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1)의 염원인 북벌론(北伐論)이 공론화되고 있었기에 효종은 초기부터 북벌정책을 국책으로 정하고 추진하게 되었다. 효종은 즉위 초 자신의 북벌운동을 함께 추진할 세력으로 반청사림세력을 지목하였으나, 북벌정책 추진에 대한 견해와 방법상의 차이로 반청사림세력이 잠시 정계에서 물러가게 되자 자신의 뜻에 부합되는 인물을 중심으로 북벌진영을 구축하였다.

 

효종의 북벌운동은 무력을 통한 청의 정벌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북벌계획은 군비확충에 집중되어 있었다. 게다가 소현세자의 사후 인조의 독단적 결정으로 변칙적인 왕위계승을 한 효종의 입장에서는 왕위계승의 정통성 결여라는 정치적인 부담을 안아야만 했다. 때문에 효종은 북벌정책의 군비확충을 통하여 군사력을 왕에게 집중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반면, 인조를 도와 반정을 성공시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반청적 사림세력의 입장에서는 명분상으로도 북벌론의 공론에 힘을 실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에서 효종은 북벌계획의 대임을 오늘날까지도 여주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꼽고 있는 훈신 원두표(元斗杓)와 무신 이완(李浣)에게 일임하였다.

 

원두표는 원주 장산촌(지금의 여주군 북내면 장암) 사람으로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책봉되었던 훈신이며, 병자호란 당시 어영부사로 남한산성의 북문을 수비하는 등 공적과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원두표는 인조대부터 사림세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문관 출신으로서 북벌론의 이론적 근거도 충분하였다.2) 그리하여 효종은 원두표를 병조판서에 특서하였고 나아가 나라를 그에게 맡기겠다고 말할 정도로3) 그를 신임하였다.

 

또 다른 여주 출신으로 무신 이완은 인조반정의 공신인 무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수일(李守一)의 아들로 병자호란 때 정방산성(正方山城)을 맡아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후 함남·황해도 등 여러 곳의 병사를 주로 역임하였다. 최명길의 천거로 당시에는 드물게 무신으로 승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완 역시 인조반정시의 공적과 대표적 무신집안으로서 군사적 능력은 익히 잘 알려져 있었다. 효종 초기에 포도대장을 시작으로 어영대장과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북벌론에 참여하였는데, 주로 효종의 신변 안전을 위한 궁궐숙위와 왕의 호위 및 중앙군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완은 사림들에 의해서 여러 차례 탄핵을 받게 되어 사임신청을 하기도 하였지만, 효종이 이를 거절하였다.4) 세 차례나 병조판서로 제수 되기도 했으며, 효종의 사후에도 현종의 신망이 두터워 무신으로서는 드물게 우의정까지 지냈다.5)

 

이와 같이 효종이 원두표와 이완을 축으로 그 진영을 구축한 것은 문무를 조화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문신 원두표에게는 국방정책을, 무신인 이완에게는 실제적인 군무를 맡긴 것이었다. 효종은 군비확충의 북벌정책을 비판하는 신료들 사이에서 인재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원두표와 이완에 대한 신임이 각별하였다.

 

효종은 원두표와 이완을 통하여 자신이 펼치고 싶은 북벌계획을 추진해나가며, 반청적 사림세력의 대표주자인 송시열·송준길 등과는 그 노선과 방법을 달리하였다. 순종대에 여주의 기천서원에 배향된 인물인 홍명하의 경우는 효종대 조신으로 맹활약하였으나, 그 역시 효종의 북벌진영과는 다른 송시열·송준길과 같은 노선에 서서 북벌론을 전개하였다.

 

왕 주도의 군비확충을 통한 북벌계획은6) 1652년(효종 3)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나, 실은 효종 즉위 초부터 왜군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청의 감시를 피해 성을 수축하였고 군사와 무기를 정비하는 등 북벌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청의 감시가 심해져 즉위 초에 잦은 사신의 방문을 당해야 했다.7) 청 사신의 잦은 방문은 경제적 부담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군사력 정비에 큰 장애가 되어 북벌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청의 감시와 비판적인 사림세력 때문에 북벌계획의 추진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했기에, 더욱 효종은 원두표와 이완 같은 훈신 혹은 훈신의 집안으로 신뢰할 만한 인물들을 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효종의 북벌운동 중 주요한 것을 살펴보면, 첫째 중앙군의 강화, 둘째 지방군의 정비, 셋째 관무재·열병식 거행 등을 들 수 있다. 효종은 수도권 중심의 중앙군을 증강시키는 데 힘을 쏟았는데, 이 중앙군의 강화는 이완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우선 수어청을 강화하고자 남한산성의 재건을 도모하였고 도성에 인접한 지역의 군사관할을 맡게 하였다.8) 1652년(효종 3) 6월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특서하여9) 어영군을 확장하였고 어영청에 자체적 재정 운영권을 주어 군경비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여 독립된 군영으로 완성시켰다. 이로써 어영군은 국왕을 호위하는 수도경비군이 되었다. 또한 1653년(효종 4)부터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여 훈련도감군의 증강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완을 등용하여 중앙군의 군비를 확충한 것은 효종에게 있어서 군사력을 이용한 북벌계획를 달성하려는 의지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효종이 군사력을 중앙군에게 편중시켜 군비를 확충한 것은 자신에게 중앙군을 집중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전쟁시 일사불란한 태세를 갖추고자 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효종은 지방의 군사정비도 소홀하지 않아 원두표를 중심으로 추진해나갔다. 예컨대 지방군은 영장제도(營將制度)와 노비추쇄제도(奴婢推刷制度)를 통하여 정비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중앙군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효종은 1654년(효종 5) 원두표가 추천한 20여 명의 영장을 남부지역에 파견하여 북벌을 위한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10) 그러나 잦은 흉년과 오랜 양역(良役)의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민의 불만이 커졌고 조신들도 영장파견의 성과가 없는 것에 대하여 비난을 가했다. 결국 1656년(효종 8) 7월 노비추쇄를 마무리할 때까지 별 성과가 없었다.

이와 같이 효종은 군비확충을 위하여 지방군도 적극적으로 보강하려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영장과 어사의 파견으로 인하여 향촌사회에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키게 되어 민심도 잃고 신료들의 비난을 샀다. 특히 신료 및 문신들에게 반감을 샀던 이유는 주로 영장이 파견된 곳이 경상·전라 등의 지역이었는데, 이는 남부지방이 재야 사림세력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앙군 및 지방군의 정비는 효종에게 있어서 북벌운동의 추진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변칙적인 왕위계승에서 오는 위협을 막기 위한 군사력 확보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효종은 인조의 치세 기간 계속되었던 역모사건과 왕위계승의 정통성 결여 및 친청세력의 도전을 왕권유지에 큰 장애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군사력의 확보를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인식하에 그는 북벌론이 공론화되자 자연스럽게 군사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켜나갔던 것이다.

 

또한 효종은 북벌운동을 추진할 때 관무재(觀武才)와 열병식(閱兵式)을 실시하여 군정 사무능력에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다. 1652년(효종 3) 5월에 관무재를 다시 설치할 것을 분명히 하였는데,11) 이것은 무사들의 기량 시험과 군사훈련을 통한 새로운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에 대사헌 민응형(閔應亨) 등 신료들이 관무재의 시행에 관해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은 그 해 8월에 모화관(慕華館)에서 관무재를 거행하였다.12) 무사 선발를 위한 관무재는 매년 실시되었으며 일반군사들의 능력을 사열하는 열병식도 병행하였다. 무신의 채용은 많은 조신들에게 불만의 대상이 되었고 후일 이로 인하여 문·무간의 불신이 생겨 북벌정책 수행과정에서 문신들의 지지를 잃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문신들의 불만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실질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이완과 원두표에게 집중되어 그들을 여러 차례 탄핵하기도 하였다. 앞서 이완이 밀부(密符)를 풀어놓고 어전에서 불평하는 방자한 행동을 한 일이 있었는데, 문신들은 여기에 대해서 일개 무관이 조정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고 하여 탄핵하였다.13) 이러한 문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량에서의 열병식이 예정대로 행해짐에 따라 문·무의 대립은 더욱 고조되어갔다. 사간원에서는 원칙을 무시한 무신들의 승진을 비판하고, 병조판서 원두표와 무신 통제사 황헌을 탄핵하였다.14) 그러나 오히려 원두표는 영장의 품계를 높여줄 것을 주장하여 문신들의 반대가 극렬하였는데, 이때도 효종은 문신들의 반대를 일축해 버렸다.15) 북벌운동이 추진되는 동안 이러한 문·무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효종조 북벌론의 큰 장애로 작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항간에서는 괴이한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민심이 효종에게서 떠나 있었다.16) 그러나 효종은 자신의 정사가 광해군 때보다 심하지 않은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고17) 할 정도로 민심이반의 향배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였다.18) 이렇게 문·무의 갈등이 더욱 악화되는 상황과 효종의 문신에 대한 잦은 불만 표출로 인하여 신료들의 지지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종의 북벌정책은 무리한 군비확충과 군역부담의 가중과 함께 계속된 재변 등으로 인하여 민심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무신의 우대와 재정적 부담으로 문신들의 지지마저도 잃게 되었다. 급기야 재위 10년 만에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사실상 북벌운동의 추진은 끝을 맺고 말았다. 이후 북벌운동은 현종·숙종대에도 계승되었지만, 효종대만큼 왕 주도의 적극적인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공교롭게도 효종대의 북벌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핵심 인물인 효종을 비롯한 원두표와 이완 모두 사후에 여주 땅에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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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