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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섬 묘 전경
□ 소재지 : 흥천면 대당리
□ 시 대 : 조선
경섬(1562~1620)은 광해군대(光海君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퇴보(退甫)이며 호는 칠송(七松) 또는 석촌(石村)이다.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경복흥(慶復興)의 후손이자 이조참판 경혼(慶渾, 1498~1568)의 손자이며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경시성(慶時成, 1536~1595)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 사마시(司馬試)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고 출사(出仕)하였다. 1598년(선조 31)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에 다녀왔고 1601년(선조 34) 지방으로 내려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그리고 1607년(선조 40) 교리(校理)에 재직시, 임진왜란 종전 후 처음으로 파견된 통신사(通信使) 여우길(呂祐吉, 1567~1632)의 부사(副使)로 일본에 건너가서 조선인 포로 1,340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이후 부제학(副題學) 등을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묘는 대당리 청댕이 마을의 맞은편 동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7, 폭 93, 두께 44), 상석(높이 27, 폭 151, 두께 85), 향로석(높이 41, 폭 36, 두께 34.5), 망주석(높이 242, 폭 69, 두께 68), 차일석(遮日石, 높이 21.5, 폭 17, 두께 31.5), 제주병석(祭酒甁石, 높이 16, 폭 56, 두께 44)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으며, 문인석과 장명등은 최근에 추설(追設)하였다. 원형의 호석(護石)을 새로 두른 봉분의 좌측에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의 묘표(총 높이 160.5)가 특이하게 종(從)으로 건립되어 있다. 검게 산화된 대리석 비신(높이 140.5, 폭 64.5, 두께 19)의 앞면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題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경공섬지묘(慶公暹之墓) 정부인(貞夫人) 완산이씨(完山李氏) 부좌(祔左)”라 쓴 후, 뒷면의 중앙에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오기축(五己丑, 1889, 고종 26) 구월(九月) 일립(日立)”이라 기록하였으나 음기(陰記)는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또한 묘역의 좌우에는 복련(覆蓮)이 장식된 8각 대석(臺石) 위에 연주(連珠)·운각(雲角)·염우(廉隅)를 화려하게 조각해서 주신(柱身)을 세운 장명등이 당당히 서 있다. 좌측 망주석의 주신에는 다람쥐가 아래로 향하고 있는 반면에, 우측 망주석의 다람쥐는 위로 오르고 있다. 그리고 상석의 우측에는 제사 때 사용할 술병(祭酒甁)을 잠시 올려 두던 제주병석이 놓여 있으며, 묘역의 네 귀퉁이에는 차일석이 설치되어 있다. 한편 묘역 내에 있던 원래의 동자석은 7~8년 전에 도난당하였다.
경섬 묘 바로 위에는 아버지인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경시성(慶時成) 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 입구에는 최근에 건립한 경섬 묘갈(墓碣)과 숭모재(崇慕齋)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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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