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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의 중앙에 건립된 권총 신도비
□ 소재지 : 점동면 원부리 161-24
□ 시 대 : 조선
권총(1413~1480)은 성종대의 인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불문(不聞)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아버지는 길창군 권규이고 어머니는 태종의 제3왕녀인 경안궁주(慶安宮主)이며 장인은 좌찬성(左贊成) 최사강(崔士康, 1385~1443)이다. 9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자, 태종이 불쌍히 여겨 궁중에서 머물게 하였다. 관직은 세자좌참군(世子左參軍)을 시작으로 1429년(세종 11) 부사정(副司正)과 우시직(右侍直)을 거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다. 1457년(세조 3) 명(明)에 다녀온 후 여강(驪江)의 별업(別業)으로 물러나 유유자적하며 산수(山水)를 즐겼다. 1462년(세조 8)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며, 예종조(睿宗朝)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면서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영정(靈靖)이다.
묘는 원부리 오산(烏山, 113.3m)의 서쪽 구릉에 형성된 엄정골에 자리 잡고 있다. 족보에는 묘의 위치가 “오산계좌(烏山癸坐)”라 기록되어 있다. 묘역에는 상석, 혼유석(높이 13, 폭 64, 두께 42.5), 문인석(높이 221, 폭 55, 두께 45)의 옛 석물이 간소하게 갖추어져 있으며, 장명등은 최근에 신설(新設)하였다. 봉분 바로 앞에 혼유석을 두고 그 좌우에 상석을 1기씩, 총 2기를 배설하였다. 상석은 모두 계체석(階砌石) 위에 걸쳐 있는데, 좌측(높이 24, 폭 175, 두께 104)은 앞으로 조금 밀려 난 상태이나 우측(높이 25, 폭 176.5, 두께 106)은 원래 그 자리이다. 세장(細長)한 몸매의 문인석은 복두공복을 착용한 채 묘역의 좌우에서 시립(侍立)하고 있다. 얼굴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공복의 소맷자락은 단정하게 늘어뜨렸으며, 홀(笏)을 잡고 있는 양손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그리고 신발의 양 끝을 서로 딱 붙여 가운데로 단정히 모아놓았다.
한편 묘역의 중앙에 방부하엽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260.5)가 건립되어 있다. 검게 산화된 대리석의 비신(높이 156.5, 폭 83.5, 두께 23.5) 앞면에 큰 해서(大楷)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시(贈諡) 영정공(靈靖公) 권공지묘(權公之墓) 정부인(貞夫人) 완산최씨지묘(完山崔氏之墓)”라 써놓아 부부 합장묘임을 밝히고 나서, 비신의 뒷면 상단에 “영정공(靈靖公) 신도비(神道碑) 음기(陰記)”라고 이양빙(李陽氷)의 전서체(篆書體)로 전액(篆額)을 올려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파악할 수 있다. 비문은 당질(堂姪)인 호조참판 권건(權健, 1458~1501)이 기(記)하였으나 마모가 극심하여 육안으로는 판독이 어려운 실정이며, 서자(書者)와 정확한 건립 연대도 미상이다. 연잎을 잘 말아 올린 하엽(荷葉, 높이 약 67, 폭 95, 두께 34)의 윗부분에는 연봉(蓮峰)을 세우고, 아랫부분에는 원형(圓形)의 운문(雲紋)을 2줄로 나란히 짜임새 있게 잘 배치하였다. 방부(높이 37, 폭 127, 두께 61.5)의 윗면에는 복련(覆蓮)을 아랫면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하였으나 박락(剝落)이 심한 실정이다. 신도비의 건립 위치가 묘역의 중앙이라는 점이 매우 독특하여, 조선시대 묘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권총 묘 바로 아래에는 현손(玄孫)인 어모장군(禦侮將軍) 권겸의 묘소가 잡풀 속에 방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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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