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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서유 신도비
□ 소재지 : 산북면 후리
□ 시 대 : 조선
서유(1356~1411)는 태종대(太宗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원지(遠之)이다.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의 9세손이자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지낸 서효손(徐孝孫)의 아들이다. 1400년(정종 2) 우부승지에 재직할 때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정안대군(靖安大君, 뒤의 태종)이 승리하는 데 기여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 되었다. 이후 가정대부(嘉靖大夫)의 품계에 올라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다. 사후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묘는 후리 뒷골 마을의 북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묘역을 개수하면서 원형이 크게 변형되었으며, 옛 석물로 상석(높이 20, 폭 83, 두께 51)과 복두공복을 입은 문인석(높이 125, 폭 34, 두께 26) 1쌍 만이 남아 있다. 상석, 고석, 향로석, 문인석, 장명등은 새로 신설하였다. 봉분의 앞쪽엔 2단 호석이 설치되었으나, 나머지 부분은 매몰되어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봉분의 우측에 1974년에 세운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의 좌측에는 최근 개수하면서 옮겨 놓은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약 80)와 상석이 놓여 있다. 모두 백대리석으로 만든 것이 특이하다. 비신의 앞면에 대예(大隸)로 피장자의 신원을 쓰고 사면에 음기를 각자하였으나 찬서자(撰書者)는 미상이다. 18세사손(世嗣孫) 서만수(徐晩洙)가 ‘세사무오추(歲舍戊午秋)’에 조성하였는데, 전후사정으로 보아 1918년에 입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 입구에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205.5)가 건립되어 있다. 팔작지붕의 개석(높이 46, 폭 82, 두께 59)과 비신(높이 149.5, 폭 51.5, 두께 27.4)은 묘표와 동일한 석재의 백대리석을 사용하였으며, 방부(높이 10, 폭 85, 두께 65)는 근래에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비신의 사면(四面)에 완산(完山) 최병심(崔秉心, 1874~1957)이 지은 비문을 후손인 진사(進士) 서종복(徐鍾福)이 써서 18세사손 서만수가 세웠다. 비신의 상단에 올린 “이성군(利城君)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시양경(諡良景) 서선생(徐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전액을 통해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알 수 있으나 쓴 인물은 기록하지 않았다.
묘 바로 아래에는 동생인 교리(校理) 서진(徐晋, 1377~1432)의 제단(祭壇)이 있고, 주변의 구릉에 민경공(敏敬公) 서원(徐遠, 1311~1372), 이조판서(吏曹判書) 서선(徐選, 1367~1420), 교동현감(喬桐縣監) 서달(徐達), 안성군수(安城郡守) 서조(徐遭) 등의 묘가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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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