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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풍자비 양식의 원명구 신도비
□ 소재지 : 북내면 장암리
□ 시 대 : 조선
원명구(1680~1730)는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서구(瑞九), 호는 수우재(守愚齋)이다. 효종의 부마인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 1648~1674)의 계자(繼子)로, 문경공(文敬公) 이세필(李世弼, 1642~1718)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長男)이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을 펼쳐 명성을 떨친 창하(蒼霞) 원경하(元景夏, 1698~1761)이고 차남이 유안당(遺安堂) 원경유(元景游, 1708~1741)이며 사위가 우의정을 역임한 풍은군(豊恩君) 조재호(趙載浩, 1702~1762)이다. 또한 원경유의 사위가 순조(純祖)의 외조부(外祖父)인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 1739~1807)이다. 관직은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지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묘는 장암리 좌암마을의 뒤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고, 혼유석(높이 13, 폭 75, 두께 35), 상석(높이 47, 폭 158, 두께 96), 향로석(높이 30, 폭 38, 두께 28), 망주석(높이 170, 폭 40, 두께 40)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상석 밑에는 고석(鼓石) 대신에 장방형의 받침석(높이 20, 폭 168, 두께 43)을 받쳐놓았으며, 상석 앞면에 피장자의 신원을 각자하였다. 향로석에는 화문(花紋)과 복련(覆蓮)을 그리고 망주석에는 앙련(仰蓮)과 염우(廉隅)를 장식하였다. 봉분 앞에는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155)가 세워져 있다.
백대리석으로 만든 비신(높이 128, 폭 57, 두께 26)은 부분적으로 검게 산화된 상태이고, 뒷면에 새긴 음기는 마모가 진행되어 판독이 까다로운 실정이다. 음기는 표질(表姪)되는 월곡(月谷) 오원(吳瑗, 1700~1740)이 짓고, 중국 송(宋)의 명필로 이름난 미불(米芾, 1501~1107)의 글씨로 집자(集字)하였다. 건립연대는 “숭정후(崇禎後) □ 신해(辛亥, 1731, 영조 7) □ 춘립(春立)”이다. 묘역 아래에 총 높이 약 295㎝에 이르는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백대리석으로 만든 비신(높이 186, 폭 88, 두께 40)의 면(面)을 벼루처럼 홈을 파서 그 안에 비문을 새긴 ‘풍자비(風字碑)’ 양식의 특이한 신도비이다(『임하필기(林下筆記)』 순일편(旬一編) 풍자비(風字碑) 참조). 비문은 장남인 원경하가 찬(撰)하고 손자인 원인손(元仁孫, 1721~1774)이 “증영의정(贈領議政) 귀암(歸菴) 원공(元公) 신도비(神道碑)”라 전액을 올렸다. 글씨는 중국 당(唐)의 명필로 알려진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글자를 집자하여 새겼다. 비제는 “유명조선(有明朝鮮)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행통훈대부(行通訓大夫) 황주목사(黃州牧使) 귀암(歸菴) 원공(元公) 신도비(神道碑)”이며 건립연대는 “숭정기원(崇禎紀元) 삼경진(三庚辰, 1760, 영조 36) 중춘각(仲春刻)”이다.
미불과 구양순의 글씨로 각각 집자된 원명구 묘표와 신도비는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금석학사(金石學史)와 서예사(書藝史)의 획기적인 자료로 판단된다. 또한 신도비는 ‘풍자비’ 양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이 역시 매우 희귀한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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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