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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방부하엽 양식의 원상 묘표
□ 소재지 : 산북면 상품리
□ 시 대 : 조선
원상은 세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이고 호는 단은(湍隱)이다. 원성백(原城伯)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지낸 원선지(元善之)의 손자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원송수(元松壽, 1324~1366)의 아들이다. 고려말 관직을 지내다가 물러나 장단(長湍)의 대덕산(大德山)에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그의 덕망을 아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끈질긴 회유에 결국 마음을 돌리고 1413년(태종 13) 출사하여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제수 받았다. 다음해 검교한성부사(檢校漢城府事)를 지내고 1435년(세종 17)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나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는 상품리 산나골의 뒷산 구릉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상석(높이 18.5, 폭 132, 두께 86)과 문인석(높이 168, 폭 46, 두께 42)의 옛 석물만 간소하게 배설되어 있다. 사각형의 호석(높이 33, 폭 396, 두께 486)이 설치된 봉분 앞에 방부하엽(方趺荷葉) 양식의 묘표가 세워져 있다. 묘표는 방부하엽에서 방부규수(方趺圭首)로 변화하는 단계의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의 앞면에 “숭록대부(崇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잉여치사(仍令致仕) 증시희정공(贈諡僖靖公) 원상지묘(元庠之墓)”라 쓰고 뒷면에 음기를 새겼으나 판독이 어려워 “정통(正統) 육년(六年) 신유(辛酉, 1441, 세종 23)…”라는 기사만 겨우 확인된다. 묘역의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복두공복 차림의 문인석은, 세장(細長)한 몸매를 하고 있지만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관복의 소매 자락이 손을 덮고 있으며, 양쪽 귀에는 귓구멍을 뚫어 놓았다.
원상 묘 바로 아래에는 조선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명묘가 1기 위치한다. 봉분에 사각형 호석을 두르고 그 앞에 묘표를 건립하였으나 지금은 그 받침석만 남아 있고 비신이 망실되어 정확한 피장자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족보에는 원상 부인의 묘소와 관련하여 “남동향으로 남편 묘와 연이어 있는데 나라에서 예장하고 사방석을 둘렀다(墓在乾位繼坐國朝致禮葬四旁石)”는 기록이 있어 부인의 묘소로 추정해 볼 수 있겠으나, 확실한 고증 자료가 없어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편 묘역 좌우에 세워진 이색적인 양식의 문인석은 양팔이 凹자 모양으로 도식화 되어 있고, 손에는 홀(笏)이 없으며 머리에는 둥근 복두(幞頭)를 쓰고 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양식의 문인석이 경기도 광주시 소재의 이한(李澣) 묘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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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