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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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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대신면 상구리 산 11-110
□ 시 대 : 조선

원인손(1721~1774)은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靜), 호는 유한재(幽閑齋)이다. 광주부윤 원두추의 5세손이자 충문공 원경하의 아들이다. 1750년(영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영조 28)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가 175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홍문관부응교 재직시 영조의 왕위 계승이 정당한 것임을 밝힌 『천의소감(闡義昭鑑)』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이조참판과 판서를 거쳐 1772년(영조 48) 우의정에 이르렀다. 또한 부친인 원경하가 주장한 탕평책을 계승하고 편당(偏黨)하지 않아 영조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사장(詞章)에도 능하여 서명응(徐命膺, 1716~1787)과 함께 『어제독서록(御製讀書錄)』을 교정하였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묘는 상구리 안말의 뒤쪽에 위치한 원주원씨세장지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14, 폭 91, 두께 41), 상석(높이 45, 폭 145, 두께 94), 고석(높이 20, 폭 45, 두께 45), 향로석(높이 40, 폭 40, 두께 34), 망주석(높이 237, 폭 50, 두께 50)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의 좌우에 세워진 망주석은 기존의 어느 것보다 규모가 크게 조성되었다. 문양을 일체 장식하지 않았으나, 주신(柱身)에 매달려 뒤를 돌아보는 역동적인 모습의 세호(細虎)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봉분의 우측에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총 높이 228)가 건립되어 있다. 오석의 비신(높이 142, 폭 61, 두께 31) 앞면에 “유명(有明) 조선(朝鮮)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문민(文敏) 원공(元公) 휘인손지묘(諱仁孫之墓)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씨(南氏) 부좌(祔左)”라고 새겨진 큰 글씨는 중국 송(宋)의 명필 소식(蘇軾)의 해서를 짜집기한 것이다(前面集蘇軾書). 그리고 이조판서(吏曹判書) 황경원(黃景源, 1709~1787)이 지은 묘표음기는 중국 당(唐)의 명필인 저수량(褚遂良)의 글씨를 집자하였다(陰記集唐褚遂良書). 묘표음기의 표제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원공(元公) 묘표(墓表)”이며 상태는 완벽하다. 비신의 좌측에는 불초고(不肖孤) 원재명(元在明, 1763~1816)이 지은 추기가 있다. 연대가 기록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원인손이 돌아간 1774년(영조 50)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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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