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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적인 양식의 임원준 묘 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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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이 잘 갖추어진 임원준 신도비
□ 소재지 : 여주시 능현동 산25-5
□ 시 대 : 조선
□ 지정사항 : 향토유적 제13호
임원준(1423~1500)은 성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 자는 자심(子深),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임군보(任君輔)의 증손이자 증좌찬성 임견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에 문과급제 후 벼슬에 나갔으며 시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자자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아들 임사홍이 성종의 총애를 받고 손자인 임광재(任光載)와 임숭재(任崇載)가 각각 예종과 성종의 부마(駙馬)가 되어 한때의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모두 몰락하고 말았다.
능현동에 위치한 명성황후생가를 지나면 좌측의 낮은 구릉들 사이에 위치한 풍천임씨세장지가 나타난다. 임원준 묘소는 세장지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전후분(前後墳)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모두 2단의 오각형 호석(護石)이 봉분에 둘러쳐져 있다. 전후분의 봉분 앞에 각각 별도의 상석과 고석(鼓石)이 설치되어 있다. 전분에 놓인 상석(높이 31, 폭 184, 두께 111)의 앞면에 운문(雲紋)이 장식되어 있어 특히 주목된다. 묘역의 좌우에 시립한 육중한 몸집의 무인석(높이 263, 폭 107, 두께 85)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을 갑옷의 소매 속에 넣고 있다. 얼굴의 윤곽선이 뚜렷하고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있어 호인(胡人)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의 무인석을 대표할만한 우수한 작품이다. 피장자의 신원을 밝혀주는 묘표는 세우지 않았다.
묘역 아래에 건립된 신도비(총 높이 약 237)는 2단의 지대석(총 높이 46, 폭 254 두께 198)위에 방부이수 양식으로 건립되어 있다. 이수(높이 46, 폭 74, 두께 20)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세밀하게 조각하였으며 그 중앙 하단에 제액(題額)을 마련하였다. 백대리석 비신(높이 121, 폭 64, 두께 15)에 새겨진 비문은 마모가 극심하여 육안으로 판독이 어려운 실정이나 일본 천리대(天理大)에 소장되어 있는 『여주목고적병록성책(驪州牧古蹟並錄成冊)』에 의하면, 비문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이 찬(撰)하고 통선랑(通善郞) 신은윤(辛殷尹)이 전(篆)을 했으며, 손자이면서 과거급제 한 임희재(任熙載, 1472~1504)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1500년(연산군 6)이다.
임원준 묘와 신도비는 묘역의 구조가 특이하고, 무인석과 신도비가 규모나 양식면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뛰어나 이 분야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조선초기의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더욱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 한편 임원준 묘역의 우측에는 아버지 임견의 묘소가 있고 좌측 능선에는 아들인 임사홍의 묘소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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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