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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학파의 형성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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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학파(華西學派)는 19세기 전반에 형성되어 20세기 초반까지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위정척사 세력이다. 그들은 성리학의 위도론(衛道論), 동기론 및 의리론에 입각하여 세도(勢道)반대, 개화(開化)반대 상소운동, 항일의병운동, 복벽(復辟)적 구국운동 등을 펼쳐 한국 근대 민족주의의 태동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면 화서학파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44세 이전까지는 양근현(楊根縣)의 일개 향사(鄕士)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화서학파의 창시자 화서 이항로는 조선후기의 극심한 당쟁의 와중에서 서인-노론계에 편입되어 평생토록 경제적 곤란을 느끼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학교수에 힘썼다.1) 일개 향사에 지나지 않았던 이항로가 학파라고 부를 만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유영오(柳榮五)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김평묵의 수제자 홍재구에 의하면, 유영오는 ‘가력파요(家力頗饒) 유고팔주지풍(有古八廚之風)’이라고 칭해질 만큼 재력이 넉넉하였다.2) 넉넉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재사(才士)들을 초치하여 숙식을 제공하며 이항로에게 수학하게 하였던 것이다. 화서학파는 유영오의 적극적인 인적, 물적 지원에 힘입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항로는 유영오와 제휴관계를 맺은 다음에야 비로소 청주에 있는 송시열의 묘소를 참배하고 화양동에 들어가 만동묘(萬東廟)를 참배하였다. 또 이듬해 가을, 그는 유영오와 함께 송시열을 모신 여주의 대로사를 참배하고 돌아왔다.3) 유영오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하에서 이조, 병조 정랑,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 등 이른바 요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당색이 북인이었기 때문에 고위직인 당상관에 진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영오는 척족세도 중 풍양 조씨 내지 풍양 조씨 후원세력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그들의 논객으로서 북인을 대표하여 안동 김씨를 공박하는 상소를 올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으로 미루어볼때 유영오는 친안동 김씨계 산림들에 대항하여 풍양 조씨를 재야에서 후원할 재야여론집단을 형성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양근현으로 낙향하여 이항로와 제휴관계를 맺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4) 요컨대 이항로는 풍양 조씨의 논객이자 고흥 유씨의 종장인 유영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또한 유영오를 통하여 풍양 조씨 척족의 도움을 받아 조정이 인정하는 재야학자로 부상하였다.

 

1836년(헌종 2) 가을 유영오와 제휴하면서부터 이항로의 문하에는 수학을 청하는 학도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 포천의 김평묵은 1842년(헌종 8)에,5) 평안도 태천의 박문일은 1843년(헌종 9)에6), 경기도 포천의 최익현은 1846년(헌종 12)에 각각 이항로 문하에 입문하였으며, 유영오의 손자 유중교도 1843년부터 이항로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항로 사후 화서학파를 대표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유영오를 후원하는 풍양 조씨가 세도권력을 장악하였던 1841년(헌종 7) 이후에 이항로의 제자가 되었다.

화서 이항로는 병인양요 때 서양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주전(主戰), 척화론(斥和論)을 전개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사상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10년 동안 독학하여 주희, 송시열 등의 저작에 담긴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에 입각한 배외적 민족주의를 깊이 사숙, 체득하였다. 이후 그는 대외적으로는 서양의 사상, 종교, 물품의 유입을 막고, 대내적으로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남인세력의 발호를 저지함으로써 대표적인 위정척사론자가 되었다.

 

그의 문하에서 김평묵, 최익현, 박문일, 유중교, 유인석, 홍재구, 홍재학 등이 배출되어 화서학파를 이루었다. 이들은 이항로 사후 스승의 강학처인 양근현의 벽계정사(蘗溪精舍)를 비롯하여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안, 전라도 등에 널리 퍼져 활발한 강학활동을 전개하여 1900년 이후 전국 각지에 포진한 위정척사파 중 최대세력을 이루었다.

화서학파의 활동을 보면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그를 하야시켰으며, 1876년(고종 13) 개항을 반대하는 집단 상소운동을 일으켰고, 1881년(고종 18) 신사척사운동 때 고종 및 민비정권을 비판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을미왜변 후부터 대한제국 멸망 직전까지 국내의 제천, 평산, 춘천, 홍천과 국외의 간도지방과 연해주 등지에서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서학파의 반세도(反勢道), 반개화(反開化), 항일(抗日)운동은 최대규모로 장기간 지속되어 이후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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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