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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하 묘 전경
□ 소재지 : 흥천면 문장리 150-1
□ 시 대 : 조선
홍명하(1607~1667)는 현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이다. 충평공(忠平公) 홍관(洪灌, ?~1126)의 후손으로 판중추부사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의 손자이자 당녕군 홍서익의 아들이며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사위이다. 또한 문충공 조한영,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1626~1690), 좌의정 이세백(李世白, 1635~1703)과는 사돈지간이다.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646년 문과중시에 다시 급제한 후 규장각대교·부수찬 등을 지냈다. 그후 1650년(효종 1) 이조정랑과 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대사간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淸)에 다녀왔다. 특히 효종의 신임이 두터워 왕과 함께 북벌(北伐)을 적극 추진하였고 박세채(朴世采, 1631~16945), 윤증(尹拯, 1629~1714) 등 명신들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1659년 효종이 서거하자 삭직되었으나 재등용되어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이어 1663년(현종 4)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6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청(淸)이 사신을 보내 왕을 힐문(詰問)하자 그가 나서서 엄정한 태도로 답변하여 돌려보냈으며, 이 일로 왕은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는 문장1리 조장이마을의 뒷산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5, 폭 83, 두께 30) 상석(높이 30, 폭 139, 두께 87), 향로석(높이 40, 폭 36, 두께 30), 망주석(높이 196, 폭 42, 두께 40), 차일석(높이 17, 폭 29, 두께 14)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좌측 망주석의 주신부(柱身部)에는 다람쥐가 아래로 내려가고 우측 망주석의 다람쥐는 위로 올라가게 하는 변화를 주었으며, 묘역의 사방에 고리 형태의 차일석 4개를 설치하였다. 또한 봉분 뒤쪽의 허물어진 옛 곡장(曲墻)의 주초석(柱礎石) 위로 최근에 시멘트블록 담장을 쌓아 올렸는데, 미관상 좋지 못하여 전문적인 보수가 필요한 실정이다. 묘표는 없지만 후손의 증언에 의해서 홍명하 묘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묘역의 좌측 약 50미터 정도의 거리에는 1990년에 세운 신도비가 서 있다. 사후에 좌의정 송시열이 곧바로 신도비문을 찬술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건립을 미루다가 최근에 11세손 홍순억(洪淳檍)이 전병근서(篆並謹書)하여 조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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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