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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농민항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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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와서 조선 사회는 자연재해가 거듭 닥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농민들은 반복된 흉작으로 생존이 걸린 위기에 허덕여야 했다. 봄철에 가물어서 모내기를 하지 못하는 때가 여러 해였고, 모내기를 했어도 수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논밭이 타들어가서 폐농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에서 홍수와 태풍이 번갈아 몰려와서 농사를 망치는 일도 일어났다. 또한 병충해가 자주 찾아와서 벼줄기와 이삭을 갉아먹는 벌레가 만연하기도 했고, 역병이 극심하여 가축을 잃는 피해가 종종 일어났다. 그중 가장 심한 자연재해를 초래한 것은 빈번했던 가뭄이었다. 여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경기도 일대에서 자연재해로 농민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는 기사가 종종 나온다.

 

이 시기에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은 얼마나 자주 있었을까?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한 세기에 걸쳐 한 집안이 기록한 일기 자료를 분석한 결과1) 19세기의 100년 동안 흉년이었던 해는 모두 33년이었다. 최소한 3년에 한 해는 흉작이 닥쳤다. 이런 흉년 중에서도 농민들이 살기가 어려웠던 때는 두 해나 세 해 동안 연달아서 흉년을 맞이한 때였다. 가장 심각할 경우는 네 해에서 여섯 해 동안 연이어서 흉년을 맞은 때였다.2) 여주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흉년에는 곡식값이 폭등하였다. 19세기의 평년에 벼 한 섬의 값이 보통 3량 수준이었다면 흉년이 들면 10량 내외로 상승하였고, 대흉을 맞아서 값이 치솟으면 18량에서 20량까지 뛰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들어가서는 물가가 뛰고 흉년이 거듭되어 곡식값은 유례없이 상승하였다. 그러나 곡식값이 폭등할 때는 시장에 곡식류가 잘 나오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생활필수품을 구하기 위해 곡식을 장에 내다 팔 수 없을 정도로 품귀했던 것이다.

 

곡식값이 오르면 세정(稅政)의 근간을 흔들어놓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대동미를 거두는 기준은 면적당 생산되는 쌀과 콩의 일정한 양인데 어느 군현은 현물을 기준으로 내고 어느 군현은 정해진 돈으로 내도록 나라에서 정해주었다. 곡식값이 갈수록 올라가니까 현물세를 내는 것보다 이미 액수가 정해진 상정가로 세금을 내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반면 상정가로 세금을 내는 군현이 늘어나자 국가의 재정은 위축되어 현물세로 받는 것을 선호하게 되고 더 나아가 금납제를 줄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것은 상정가로 세금을 받던 여주에서 농민항쟁이 벌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자연재해와 기근에 대처하는 일은 나라에서 맡아야 했다. 그렇지만 극심한 상황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방 관아에서는 기근이 닥치면 전력을 기울여 아사자를 줄이는 일에 나섰으나 적절한 해결방책이 없었다. 조정에서도 구휼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지 못하고 미봉책만 쓸 뿐이었다. 이를테면 각 도별로 직첩을 할당하여 팔아서 비용을 구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지방관아에서는 지주들에게 이 공명첩을 강제로 팔아서 구휼미를 구할 경비를 마련할 뿐이었다. 겨우 구한 적은 양의 구휼미를 나눠주거나 관청 문 앞에 큰 솥을 내어걸고 죽을 쑤어 걸식자들에게 먹여서 곡기를 끊지 않도록 하는 정도였다.

 

이 같은 기근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농업 생산력이 전반적으로 낮은데다 자연재해가 연달아 닥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더구나 자연재해는 반복되는데 조세 수취과정에서 나타나는 문란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국가의 운영은 전정·군정·환곡의 삼정 수취를 통해 재정이 뒷받침되는 까닭에 수취제도에 문제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 삼정이 총액제 형태로 운영되어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총액제 방식은 미리 정부에서 세금을 거둘 총액수를 정한 다음 그것을 각 도와 군현에 분배하여 정해진 액수를 내도록 한 것이다. 군현에서는 면 단위로 나누어서 책정된 액수를 받아내도록 하였고, 그러면 면리에서도 각 마을과 농민에게 다시 그 액수를 나누어 내게 하였다.

총액제는 여러 가지 갈등을 조성했다. 이 제도는 수취를 담당한 지방 수령과 향리들, 그리고 세력가들이 마음대로 수탈할 수 있는 허점이 있는 제도였다. 왜냐하면 조세를 내야 하는 농민들은 부유한 층이나 세력가들이 부담 대상에서 빠진 대신 이중삼중으로 물어야 했던 까닭이다. 부농들은 뇌물을 주고 조금만 세금을 내는 대상에 편입되거나 아예 제외되었고, 세력가들은 권력을 배경으로 세금을 내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전정은 세정의 중심이었다. 양안이라고 부르는 토지대장에 의거하여 풍흉에 따라 수확한 곡식 가운데 일정한 비율만큼 전세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토지측량에는 경비와 인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심지어 수백 년 전에 작성한 양안을 근거로 전세를 부과하는 등 무리한 운영이 어느 지역에서나 문제가 되었다. 향촌사회의 세력가는 양안에서 기록을 빠뜨려놓고도 무사했지만 그 대신 농민들은 더 내서 보충해야 했다.

 

여주의 전답(田畓) 결총(結總)은 밭이 1천 99결(結) 76부(負) 5속(束), 논이 1천 21결(結) 56부(負) 4속(束)이었다. 여주에서는 이 토지대장을 부실하게 작성하여 적발된 적이 있었다. 1868년 호조와 선혜청에서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에는 여주의 토지를 측량해서 대장을 바르게 잡도록 하라는 것이 나온다. 또 재해를 입은 토지로 빠진 72결을 개간해서 다시 등록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전정의 운영상의 문제가 여주에서 드러나 조정에서 문제가 된 것이었다.3)

 

환곡은 춘궁기가 닥치면 양식이 끊어지는 농민들을 구휼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제도였다. 그런데 임란과 호란 이후 정부는 재정이 늘 부족하게 되자 가을에 원곡을 받을 때 덧붙여 받는 이자를 관청에서 재원으로 쓰도록 한 뒤 세금처럼 변했다. 마치 정부가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놀이를 하는 격이었다. 환곡도 대부분 세력가들은 빠진 대신 가난한 농민들에게 더 많이 부과되었다. 환곡을 지급하거나 회수할 때도 농민들의 불만을 많이 사고 있었다. 환곡은 먹을 만한 곡식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겨나 쭉정이 또는 모래가 섞인 곡식 섬을 분량도 차지 않은 채 받고, 가을에 반납할 때는 실한 곡식을 말에 넘치게 내야 했던 일이 많았다.

 

대원군이 집권해서 환곡을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게 한 것은 매우 큰 변화였다. 여주에서도 각 관청에서 장부만 있고 곡식이 없는 유명무실한 항목은 대원군의 영에 의해 1866년에 탕감해서 없애버렸다. 1871년에는 각 면의 사창 환미 1,000석을 반은 남기고 반은 분배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도록 했고, 그 이자는 상정가로 거둬들여 매년 사창에 내는 것을 정식으로 시행하였다.4)

 

군역세는 양반은 제외되고 천민도 물지 않아서 상민들만 냈던 신분세였다. 그런데 신분 변동 결과 평민 가운데 양반으로 상승하는 사람이 많아서 군역세를 내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졌어도 정해진 액수를 내야 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평민들에게 거듭 납부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일어났다. 어린 아이들과 죽은 사람도 장부에 포함시켜서 받아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난해서 내지 못한 사람들과 도망한 사람들의 몫까지 족징과 인징이라고 하여 집안과 동리에서 억지로 내야만 했다.5)

 

여주의 군총(軍摠)은 모두 2,901명이었다. 병조와 각 병영에 속한 잡다한 군액(軍額)을 합한 수효인데 군포를 거두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나 1851년에는 동포(洞布)를 설치해서 동네에서 공유지를 모아 경작해서 여기에서 나오는 수확으로 공동으로 바치게 하였다. 대원군은 1871년에 양반에게도 군포를 납부하도록 한 호포제를 실시하여 상민에게만 물렸던 무거운 부담을 줄여주었다.6)

 

호구(戶口)나 인신(人身)에 조세를 부과하는 제도는 결점을 드러냈다. 폐가하거나 도망을 하면 세금을 부과하는 대상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은 국가의 세원을 안정되게 관리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대동미는 곧 국가의 주요 세원이 되었다. 전세가 결당 4두를 바치는 제도였는데 대동미는 12두를 납부하였다. 그리고 관수미(官需米)와 경비 등 잡세(雜稅) 등도 대동미에 첨가해서 받도록 하였다. 이것은 여주에서 일어난 항쟁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어느 군현에서 조세를 걷으면 서울과 도내에 흩어져 있는 여러 관청까지 직접 운반해서 바쳐야 했다. 그런데 여러 세금 항목과 크고 작은 액수는 대대로 관아의 실무직으로 전문성을 지녔던 향리들만 알 수 있었다. 향리들은 이런 복잡한 관계를 이용해서 농민들에게 정해진 액수보다 더 많은 양을 내도록 했다.7) 일한 대가만큼 적정한 보수를 받지 못한 향리들은 초과 액수를 중간에서 갖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삼정의 문란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더구나 지방관과 관속이 축낸 세곡을 이포(吏逋)라 하여 농민에게 전가하였고, 군역을 내지 않고 피역한 사람들 대신에 농민들에게 이중삼중으로 부담시키는 일이 많았다. 지주와 부농들이 가난한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를 하던 일과 지방관청이 재정확보의 수단으로 농민들에게 고리대 식리(植利)를 했던 폐단도 적지 않았다.

 

지방관은 뇌물을 써서 벼슬을 사가지고 왔기 때문에 현직에 있을 동안 더 많은 세금을 가로채서 그동안 들어간 경비를 채우려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관들에게 상납금을 마련하려고 기회를 엿보았다. 조세를 수취하는 직무를 맡던 지방관과 향리가 이런 상태였으니 조세제도는 국가 경영을 위한 재정제도가 아니라 농민들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정치의 문란은 이와 같이 농민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부자는 3대를 내려가기가 어렵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이 말은 농민들 사이에 흥하고 쇠하는 현상이 흔히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이 부농으로 성장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수확을 늘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가내노동을 통해 면포를 제작해서 파는 방법 등으로 돈을 모으고 그것을 근검절약해서 아껴야 했다.

 

일단 부농이 되면 그 재력을 바탕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면서 그 면리 지역의 세력가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가난했던 양반들이 부자가 되면 공명첩을 사서 참봉이니 도사니 해서 관직명을 얻고 동네에서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공한 사람이 많을 수는 없었다. 농촌에서는 많은 사람이 몰락해서 날품팔이로 살아가는 일이 늘어갔다. 이들은 흉년이 닥치면 유민(流民)이 되어 유리걸식하거나, 떼를 지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도둑이 되기도 했다.

 

조선의 왕조정부는 민생의 안정을 꾀하는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의 문란은 갈수록 심해졌다. 정부의 관료체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양반 지배층은 안에서 분열 대립하였고, 정부 재정은 늘 부족해서 체제 자체가 동요하였다. 밖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를 넘보면서 침략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구미 열강은 중국과 일본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한 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제품을 팔면서 더 큰 이익을 남기기 위하여 시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였다. 조선 정부는 중국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 듣고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유교 사상을 토대로 양반지배층이 통치하는 사회였다. 본래 양반에겐 음서나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누구나 기회만 닿으면 관료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면 양반지배층이 중심을 단단히 지켜주어야 했다. 그렇지만 조선사회는 이미 지배층 내부가 동요되었고, 사회질서는 혼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붕당정치의 폐단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래서 어느 당파가 권력을 잡아서 관직을 독점하면 다른 집단은 정권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외척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소수의 벌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양반들이 관료가 되는 기회를 상실하였다.

 

양반 문중은 후손들의 교육에 열심이었다. 양반가의 젊은이들도 과거에 급제해서 입신양명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그 등용문 역할을 했던 과거제도는 기능이 마비되기에 이르렀다. 참신하고 역량이 있는 관료군을 배출하던 과거합격자는 과거 형식의 정해진 글쓰기 연습이나 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능력 평가의 기준이 되었던 유교 지식이 밝은 사람보다 권세 있는 왕실의 외척이나 그들과 가까운 사람만 고위 관직에 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외척의 세도정치는 갈수록 강화되어 철종대에는 모든 권력을 안동 김씨 중에서도 정조의 총신이던 김조순(金祖淳)의 직계 후손들인 장동(壯洞) 문중이 장악하였다. 고종대에는 여흥 민씨가 권력을 장악한 후 과거제도의 문란은 더욱 심해졌고, 관직은 민씨 척족과 가까운 사람들이 독점하였다.

 

중앙정치에서만 조선 본래의 지배체제가 변질된 것은 아니었다. 군현 단위의 향촌사회에서도 크게 바뀌어졌다. 국왕이 파견한 지방관은 목민관이라고 불렀다. 그는 향촌사회의 백성을 왕조의 충직한 신민으로 기르고 유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서 교화시키는 임무를 지닌 관리였다. 또한 지방관은 조세 상납 등 중앙정부와 관련된 중요 사항에 중점을 두고 군현을 다스렸다. 하지만 각 군현의 향촌사회는 여러 면에서 자치 형태로 운영되었다.

 

향촌사회에서 양반신분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높았다. 양반 유생들이 독점한 향청과 향교 그리고 서원을 통하여 여론을 주도해서 주자학에 의거한 상하관계의 사회질서를 지켜나갔다. 양반층이 그러한 위치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경제력과 사회 관행이었다. 양반지주층은 그들이 가진 토지와 노비의 소유권을 통해서 전호농민을 지배했고, 군역세를 면제받는 등 관청에서 인정한 특권을 활용해서 우월한 지위를 과시하였다. 더구나 과거에 합격해서 진사가 되거나 관직에 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일족 모두가 당당한 양반으로 행세하였다. 세력가 중에는 농민들을 불법으로 착취하는 토호행위로 인심을 잃는 양반도 나왔다.

 

하지만 18세기 이래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는 급격히 무너져갔다. 양반 가운데 관직과 인연이 없던 계파는 경제면에서 몰락하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다. 노비가 신분을 상승하고 또 도망노비가 증가하던 사회 풍조도 결국 양반지주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전세를 돈으로 내는 금납화가 진행되고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조세의 부과 대상이 토지에 집중됨으로 조세수취 과정에서 양반세력가가 차지했던 우월한 지위도 없어졌다. 오히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은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농민층 가운데 농사를 잘 지어 소득을 올리거나 상업과 수공업을 통해 새로 성장하는 계층이 나타났다. 이들은 부농으로 세력을 키워 양반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향촌사회 내부에서 그동안 명문가로 인정받아온 양반성씨와 신향이라고 불린 신흥 양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명문 양반들은 신향들도 아래사람으로 간주해서 함부로 다루려고 하였지만 신향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들 두 세력은 향촌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향전을 벌이게 되었다. 향촌질서가 상층부에서 무너지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향촌사회 내부에서 갖는 양반들의 위세는 이전보다 현저히 낮아졌다. 그 반면 지방관의 향촌 통제력은 강화되었다.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던 양반들은 지방관의 권위에 눌려야 했다. 이에 따라 군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향리들의 역할도 증대하였다. 이제 지방관과 향리들이 양반을 포함해서 군현민들을 강력한 권한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향청은 위세를 잃게 되었고, 향청의 임원들은 지방관이 할당해준 세금을 걷는 일을 맡는 등 볼품이 없어지기도 하였다.

 

19세기에 동아시아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구미 열강과의 관계에서 야기되었다. 조선이 밀접히 교류해온 청나라는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대국으로서의 품격을 잃고 있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뒤 1842년 남경조약을 맺고 불평등조약을 허용하였다. 잇달아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청은 한족의 항거가 촉발되었고, 열강의 침략에 반대하는 반외세운동이 일어났다. 1851년에 홍수전(洪秀全)이 세운 태평천국은 1864년까지 남중국 일대를 지배하면서 경작자에게 토지를 균등히 나누어주고, 노예 매매와 아편 흡연을 비롯하여 음주와 도박까지 엄히 금하고 남녀평등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공자묘와 불사, 도관을 파괴하고 군대 규율을 엄격히 하여 약탈을 금하였다. 결국 태평천국의 토지제도 개혁에 공포를 갖게 된 향신(鄕紳)과 청의 관군 그리고 영불 연합군에 의해 태평천국은 무너졌으나 청의 위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종교를 업은 반군이 조정에 모반해서 나라를 세운 사실도 국내에 잘 알려졌다.

 

또한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략한 과정이 국내에 전해져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가 청군과 싸워서 일방적으로 승리했다는 소문은 매우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청의 위급한 사정이 전해지면서 도성에서 외지로 피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조선 근해에도 서양 기선들이 여러 차례 출몰하였다. 러시아의 군함은 자주 연안에 들어와 교역을 요청하여 정부에서 경계하였다.

 

청을 거쳐서 들어온 천주교는 성리학의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인해 유생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학을 이단으로 배격하는 척사론이 대두되었다.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도 커져갔다. 임진왜란의 혹독한 피해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명치유신 이후 조선과 새로운 형태의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는 단연 거부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정권이 들어선 뒤 1876년에는 일본과 새롭게 근대 방식의 외교 통상관계를 시작하였고, 서양 열강과 통상조약을 맺은 뒤에는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이 모색되었다.

 

1884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였다. 개화정책을 둘러싼 급진과 온건세력이 충돌한 이 정변으로 개화파는 쇠락하였고, 그 이후 청 세력에 의존하는 민씨정권은 변화를 막기에 급급하였다. 1885년 고종 연간에 발생했던 여주민의 항쟁은 이런 국내외 배경 속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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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