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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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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대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진입하였고, 같은 목적으로 조선에 진입한 청군과 아산만에서 맞닥뜨려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침략을 더욱 노골화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독점적 지배를 경계하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이른바 3국 간섭에 의해서 조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되었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팽배하여 조선의 침략이 다소 지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다소 소원한 듯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더욱 심화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 후 조선의 정치와 경제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침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후 국내에서는 제 1, 2, 3차에 걸친 김홍집 친일내각이 등장하였다. 친일내각은 을미개혁과 단발령을 내렸으며, 이에 항의하여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한편 고종은 친일 김홍집 내각에 대응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을 감행하였다.

 

아관파천으로 정치세력에 일대 변혁이 있게 되었는데, 친일내각에 참여했던 총리대신 김홍집, 농상공 대신 정병하, 탁지부 대신 어윤중 등이 처형되었으며, 외부대신 김윤식은 유배되었고, 유길준과 조희연 등은 일본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결국 온건 개화사상가들이 이끌었던 친일정권은 몰락하고, 친러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독점적인 지배에 대하여 반대세력의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독점적 지배는 확고해져갔다.

 

한편 개항 이후 일본의 독점적인 조선의 침략은 조선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조일수호조약에 따라 부산, 인천, 원산에서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수출입 상품이 급증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 무역세로 상호 마찰을 겪기도 하였으나, 1895년 무역잡세가 폐지되었고, 1897년에는 무명잡세가 금지되기에 이르러 점차 무역의 장벽도 허물어졌다.1)

특히 농촌경제는 대량의 곡물이 일본으로 수출됨으로써 황폐화가 심화되었다. 더욱이 흉년으로 인하여 곡물생산량이 감소하였으나 일본은 계속하여 수출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1898년 함경감사 조병식은 흉년을 이유로 1년간 대일본(對日本)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려 일본과 마찰하였다.

 

또한 조선은 조선 땅에서 생산되는 유한(有限)한 곡물만 수출하고, 무한(無限)적으로 생산되는 일본의 면제품을 수입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산업화에 따라 부족한 식량을 생산해주고, 그들의 생산물을 소비해주는 일본 자본주의의 소비시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또한 곡물의 수출과 함께 일본화폐의 조선침투로 인하여 경제공황에 직면하게 되었다.2) 일본은 금광은 물론 철도건설에 있어서도 독점(獨占)과 광점(廣占)을 해나갔으며,3) 일본의 자본이 조선에 투입되기 시작하여 일본자본에 의한 예속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집권세력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으나, 정치세력 내부의 갈등과 국민적인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조선이 처해 있는 국내외적인 위기상황을 극복해나갈 새로운 사상이 역사적으로 요구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요구에 따라서 등장한 것이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따른 일본의 보호국체제하에서 국권회복을 목표로 전개된 민족운동의 한 형태이다.

 

1904년 고문정치, 1905년 보호조약과 후속조치로 단행된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 제정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가 구체화되자 상실한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국권회복운동이 당대의 시대적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국권회복운동은 운동을 추진하는 세력과 운동의 전개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는데,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 그것이다. 전자가 주로 지식인들이 주체가 되어 합법적인 실력양성을 통한 점진적 국권회복을 추구했다면, 후자는 위정척사사상에 의거한 유생과 백성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이룩하고자 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실업(實業)을 진흥함으로써 경제적 문화적 실력을 양성하고 나아가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장차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한다” 는 취지4)에서 알 수 있듯이 독립의 기초로서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고, 구체적으로는 각종단체와 학회활동, 신문·잡지 출판운동, 학교설립을 통한 교육운동, 종교를 통한 민중의 각성, 나아가 국채보상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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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