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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면사무소 맞은편 약 300m쯤의 거리에 약 150m 정도 높이의 야산이 있다. 이 산의 동쪽 벼랑 밑으로는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고 서북쪽으로는 민가가 밀집해 있다. 이 산의 북쪽 산록에는 봉분 둘레 약 15m 정도의 잘 손질된 묘소가 있는데 이 묘가 바로 천령최씨(川寧崔氏)의 시조묘(始祖墓)다.
그리고 이 묘에서 남쪽으로 30m쯤 내려오면 사당이 있는데 2004년도에 여주군의 재원으로 개축되었다. 이 동네에서는 이 사당을 삼신당(三神堂)이라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사당과 묘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여말선초의 고승 무학대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옛날의 이포리는 현재의 면사무소 뒤편, 속칭 수굿말이라 하는 곳에만 인가가 있었고 다른 곳에는 거의 없었다 한다.
이포리는 주변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육로는 협소하였지만 바로 앞을 남한강이 흐르고 있어 옛부터 강을 이용한 수상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최씨 일가가 외롭게 살고 있었는데 부자(夫子)가 낡은 배 한척으로 남의 짐을 운반하여 그 품삯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하루는 서울까지 짐을 운반하고 돌아오려는데 한 도승이 여주까지만 태워다 줄 것을 부탁했다. 최씨부자는 우리 배는 닻도 없고 낡아서 느려서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속력이 빠른 다른 배를 타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탄압을 받고 승려가 제대로 대접을 못 받던 때라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도승은 더디가도 좋으니 배는 걱정 말고 자기만 태워달라고 간청하므로 도승을 태우고 여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돛도 없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배가 쏜살같이 달려서 먼저 떠난 다른 배를 앞서가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배의 양 옆을 보니 용 두 마리가 양쪽에서 배를 끌고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점심 때가 되어서 배에서 잡은 고기로 생선국을 끓이게 되었는데 최씨부자는 도승을 시험하기 위하여 고의로 생선국을 대접했다. 그러나 도승은 주는 생선국을 아무 말 없이 달게 먹음으로 “스님도 고기를 잡수십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도승은 “누가 고기를 먹었느냐?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내가 대변을 볼 터이니 보아라” 하면서 배의 고물에 가서 대변을 보는데 대변이 물고기로 변하여 물에 떨어져 헤엄쳐가는지라 최씨부자는 이 도승이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극진히 대접하여 이포까지 오게 되었다. 이포까지 온 도승은 “내가 신륵사에 갔다가 오는 길에 다시 들리겠다” 하고 사라졌다.
여기서 말한 대사는 무학대사였다 하며, 동자(이 지방말로 빠가사리의 일종)의 배가 노란 것은 무학대사의 대변 빛깔이 옮아서 노랗다 한다.
얼마 후 도승은 돌아가는 길에 이포에 들려 최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최씨는 부친상을 당하여 있었다. 최씨가 상중인 것을 보고 도승은 “당신은 상을 당한 것 같은데 모실 묫자릴 잡았는가?” 하고 묻자 “갑자기 상을 당하여 아직 묫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했다.
그러면 내가 “묫자리를 하나 잡아줄 터이니 여기에 묘를 쓰되 장차 이 묘 앞으로 길이 날 것인즉 이 길에서 철마가 달리거나 소, 말발굽소리가 나면 너희 자손들은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렇게 하여 무학대사가 잡아준 곳이 천령 최씨의 시조를 모신 지금의 이 묫자리이다.
이 동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묫자리는 돼지혈이라 하며 현재 돼지의 눈에 해당하는 자리에 묘지가 있으며 입부분을 현재의 면사무소 쪽으로 두고 있다 한다. 그 입과 머리 사이의 중앙을 통하여 도로가 나 있다.
무학이 예정한대로 도로가 나서 하루에도 수백 대의 철마가 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최씨들은 이 지방에서 모두 떠나고 단 한 집만이 살고 있으나 생활이 곤란하며 매우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있다. 반대로 외지로 떠난 사람들은 모두 성공하여 잘 산다 한다.
주민들은 500여 년 전 무학대사가 말한 것이 맞다고들 한다.
이 묘지에서 30m쯤 올라가는 산중턱 서남쪽으로 약 3평 가량의 사당이 있다. 이 사당 안에는 한 노인의 화상이 있는데 오랜 세월동안 풍화에 시달려 매우 퇴색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당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하다.
앞서 말한 대로 당시에는 고개 넘어 수굿말에만 몇 호의 인가가 있었을 뿐 이 묘지 쪽으로는 민가가 없었다 한다.
도사가 잡아준 이 묘를 쓴 후에 민가가 늘어 마을이 형성되고 또 번창하였다 한다. 아무리 무서운 전염병도 이 마을만은 침범치 못했으며 이 마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다.
마을을 이룩하고 재앙과 질병을 막아주어 번창하게 한 것은 오직 이 명당에 묘를 쓴 최씨의 시조 덕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은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삼신당의 유래는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어느 때 세워지고 어느 때부터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지금도 매 3년마다 한번씩 전 부락민이 참석하여 어김없이 제사를 지낸다. 가을에 길일을 택하여 몸과 마음을 정히 하고 정성들여 제사를 지낸다. 이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 지역 일대의 가장 큰 부락행사로서 3,000여 명 이상의 주민이 모여 마·소를 잡아 음식을 준비하여 그 규모나 절차에 있어 성대였다고 하나 근래에 와서 이것도 많이 간소화되었다 한다. 사회분화(社會分化)의 한 과정에서 부락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따라 초창기 매년 거행하던 성대했던 의식도 흥천면 효지리에 거주하는 무속인 임춘수와 부락민에 의하여 3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삼신당의 삼신(三神)은 누구일까? 이 전설의 유래로 보아 무학대사, 천령 최씨의 시조 그리고 산신의 셋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사당 아래쪽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으로 올라오면서 북쪽 강가의 바위 틈에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은행나무가 지금도 있어 군 보호수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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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