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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치솟은 천덕봉(天德峯)은 걸핏하면 토라진 여인처럼 안개와 구름 속에 자태를 감추기가 일쑤다.
드높은 산봉은 흥천면(興川面) 외사리(外絲里)의 비옥한 들녘과 구름을 감싸 원적산(圓寂山) 낙맥(落脈) 중 가장 높은 정상에 자리잡아 여주, 이천, 광주 등지의 3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바로 그 산기슭 아래 자리한 동네가 외사리, 상대리, 현방리 등이다. 그 언저리 40리 안을 금반형이라 부를 뿐 그것이 어디를 꼬집어 말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실정이다.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세여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고 마치 옥녀가 상을 들고 있는 형세여서 옥녀봉반형(玉女奉盤形)이라고도 한다. 이 금반형에 집터를 잡으면 극(極)을 이뤄 산줄기와 물줄기가 태극형으로 서로 어울린 곳이다.
마치 사람이 서쪽의 주봉인 천덕봉(天德峯)에서 쭉 뻗은 두팔로 감싸안듯 동쪽을 바라보고 서면 왼쪽 팔꿈치에 해당되는 자리에 자봉(子峯)이 있고 다리(지명)을 향한 손목부위에 성조산(聖造山)이 있다.
반대편 남쪽에 조산(鳥山)이 있고 장관대(壯觀臺)에 바로 산과 물이 엉키듯 사수동파(四水同派)가 백리천(百里川)하여 서로 휘감아싼 이 지역이 금반형(金盤形)이라는 소문이 방방곡곡에 퍼져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정착하여 동리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때 명(明) 수군(授軍)사령관으로 우리나라에 왔던 이여송(李如松)이 왜군을 무찌르려고 고양군까지 왔었는데 그때 금반형에 대한 비기(秘記)를 알아 문헌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여송의 외손자 두사충(杜士沖)이 조선에 가서 살겠다고 하니 그렇다면 금반형에 가서 살라 하여 천신만고 끝에 금반형을 찾아오다가 금반형이 이천(利川)에서 금사(金沙) 쪽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들어 여주 쪽으로 오게 되었다. 한참 오다가 산세가 하도 좋아 촌로들에게 물으니 그곳이 바로 금반형이란 말에 그만 넋을 잃고 물끄러미 건너다 보았다 해서 그 고개 이름이 ‘두무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금반형이라 부르는 외사 2리에는 쌀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흙으로 쌀두지(뒤주)를 만들어 보관했다 해서 흙두지 마을이 있으며, 장등말 성황당이 있는 금반형이라 부르는 이 지역이 해방후 40여 년간 흉년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넓은 들녘과 비옥한 땅이 낙토라고 부를 만하다.
숙종 때 정승인 김관주(金寬柱)가 청(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어느 고관집에 초청을 받았는데 그 집이 바로 이여송의 친척이었다. 그집 주인이 조선에 금반형이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라고 하며 비기를 수록한 문헌을 주었다.
일을 마치고 황해(黃海)로 되돌아오는 도중 별안간 광풍이 휘몰아쳤다. 배가 요동하여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두 당황하였다. 반장(船長) 용신(龍神)이 노(努)하였으니 금붙이 등을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모두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배 안의 사람들은 결국 몸에 지닌 패물을 모두 바다에 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노한 파도는 점점 드세게 일뿐 그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풍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책만 읽고 읽는 선비가 있었다. 사람들이 저 선비 때문일 거라고 수군거리자 선비는 읽던 책을 바다에 던졌다. 그러자 노한 파도는 조용히 잠들고 배는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 후 배안의 선비였던 김관주가 귀국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이곳 금반형에 와서 아흔아홉 칸의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여우내들이 있어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외사리들을 가로지른 복하천 연변에 가난한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생활은 빈곤했지만 낮이면 열심히 논밭을 일구고 밤이면 서당에 나가 글을 읽었다. 글방선생은 그가 열심히 사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눈여겨 보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총각의 눈은 총기를 잃어가고 끝날 시간만 되면 안절부절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그에게 일이 힘들어서 그러느냐 아니면 공부에 지쳤느냐고 물어보아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총각은 오지 않았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그는 늘 왔었다. 선생은 아무도 없는 썰렁한 서당에 앉아 장지문에 어른거리는 달빛을 보았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나가보니 그 총각이었다. 사람을 급히 불러 방안으로 옮겨보니 정신을 잃었고 안색은 창백하였다. 물을 먹이고 수족을 주무르자 총각은 깊은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이를 본 선생이 연유를 묻자 총각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서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어느 날이었다. 자신의 집에 가려면 반드시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그 개울 옆에 외딴집이 있었다. 아무도 없던 집이라 조용했었는데 그가 집을 지나려 하자 누군가 “여보세요”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가 뒤돌아보니 그집 문 앞에 어여뿐 처녀가 손짓하며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다가가자 그 처녀는 말도 없이 손을 내밀어 구슬 한 개를 주고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구슬을 가지고 집에 돌아온 그가 자세히 살펴보니 도토리만 한 크기에 영롱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 구슬은 사라지고 없었다. 여러번 처녀로부터 구슬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아침이면 없어지니 그것이 이상하였다. 또 총각은 그녀를 보지 않고는 잠이 들 수 없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마침내 선생에게 이를 물어보려고 오다가 쓰러진 것이라고 하였다.
글방선생은 총각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누워 있는 총각의 귀에다 무엇인가 일러주었다. 기운을 차린 총각은 전과 같이 서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날도 역시 예쁜 처녀가 집 앞에 나와 손짓하고 부르며 구슬을 주었다. 총각은 구슬을 받아들자마자 입에 넣어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다급하게 땅만 쳐다보았다. 그 처녀는 황황히 사라져버리고 총각이 글방선생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글방선생은 무릎을 치며 탄식했다. “하늘까지 보았으면 천문(天文)에도 통달할 것을 땅만 보았으니 지리(地理)뿐이로구나.” 선생의 말은 구슬을 삼킨 후 땅을 보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천지의 이치를 통하는 도인(道人)이 되는데 땅만 보았으니 풍수지리(風水地理)에만 통달한다는 뜻이었다. 이 총각이 나중에 유명하게 된 박상의(朴相義) 선생이었다. 그 후 아무도 찾지 못하던 금반형(金盤形)을 총각이 찾게 되었고 나중에 스승의 은혜에 보답코자 이를 알려드리려 하였다. 그러나 스승이 연로하여 하인이 대신 가게 되었는데 총각이 가르쳐준 지점에 말뚝을 박고 돌아오다가 말에 채여 죽었다. 이로 인하여 금반형이 어디인지 확실히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총각에게 구슬을 주었던 예쁜 처녀는 그 후 꼬리 긴 여우로 변했다고 하며 이 고장 사람들은 총각이 건너다니던 개울을 ‘여우내’라 하고, 외딴집이 있던 자리를 ‘여우내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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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