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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치고개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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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 신륵사(神勒寺) 동대 육각정(六角亭)에서 건너다 보면 금당천의 하구가 반여울을 배경으로 뚜렷하다.

옛 북원땅과 여주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당천은 심산유곡에서 물 근원하여 드맑게 넘쳐 흐르는데 금당천 지류인 개사리천에는 옛 고달의 대가람이 있었고 운촌리 쪽의 샛개울 완장천(完場川)을 거슬러 오르면 흥왕사가 있다.

이렇듯 대명찰 우두산, 소달산, 보개산, 마감산 형제봉, 삿갓봉, 자산으로 연계되는 준령이 자리잡고 있는 것만 보아도 옛 북원땅 북내와 강천면은 그윽한 산경과 운치 있는 강물의 흐름이 잘 어루러진 곳이라 하겠다.

예로부터 전한 구전에 여강에 여룡(驪龍)이 승천하려면 자욱한 안개가 휘덮인 날 여강에 머물던 용이 금당천을 거슬러 오르다가 운촌리에서 흐르는 샛개울 완장천으로 접어들어 그윽하게 높이 솟은 보금산을 따라 하늘로 승천하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높이 솟은 준령이 병풍처럼 드리워 마감산에는 옛날에 마귀할멈이 살고 있어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에게 심술을 부려 괴롭히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을 빼앗기도 하여 이 근방의 사람들을 불안케 했다는 것이다. 바로 마감산(馬甘山)과 맥을 같이 하는 삿갓봉 아래 강천면 간매리(康川面 看梅里)에 청주 곽씨(郭氏)가 500여 년을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동리가 있다.

간매리에는 청주 곽씨가 130여 호 정도 모여 사는 동리인데 집집마다 거의 택[宅]호가 있다. 그 택호는 안평 어둔이댁, 우무실댁, 성말댁, 효성댁, 서무니댁, 모란댁, 방골댁, 팔개댁, 두름밭댁, 다리목댁 등 거의 집집마다 택호가 있어 이채로운 마을이다.

청주 곽씨가 집성촌을 이뤄 전통적인 맥을 이으며 살아온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간매마을의 절경을 담은 매산 팔경이 전해오는데 그 팔경은 “은행나무아래 이은 바람이 무척 시원하여 행단화풍(杏壇和風)이요, 또한 달밤에 매화를 보는 것이 일품이라 매화간월(梅花看月)이며, 옥동이란 골짝에 소를 매고 돌아설 제 풀잎에 맺힌 이슬에 아침 햇살이 어려 마치 영롱한 구슬처럼 빛난다 해서 옥동조로(玉洞朝露)이고, 용머리에 구름 휘덮이는 것이 운치 있어 용두부운(龍頭浮雲)이며, 용머리 밖 모래밭에 기러기떼 앉은 경치를 빠뜨릴 수 없어 평사낙안(平沙落鴈)이며, 조리대밭에 밤비가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죽림소우(竹林霄雨)이다. 꽃재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황포돛배가 즐비하게 노를 드리우는 석양에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경관이 이호귀범(利湖歸帆)이며 옛날 부석에서 쏟아지는 폭포가 아름다워 부석폭포(浮石瀑浦)”라는 것이다.

숙종대왕 재임시 이 마을에서 곽경(郭璟)이라고 하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장사가 나왔었다.

부인이 보니 밤이 이슥하면 집을 나갔다가 날이 샐 무렵에 슬며시 들어와 눕기를 거의 삼 년을 한다. 이를 수상히 여긴 부인이 어느 날 밤 자는 척하다가 남편의 뒤를 몰래 따라나섰다.

집을 나선 남편은 은골 은행나무 아래로 가더니 뭐라고 주문을 외며 늘어진 은행나무 가지에서 잎을 훑어 훅 하고 하늘을 향해 분다. 숲속에서 몸을 숨기고 가슴 조이며 보던 부인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입김에 날라가던 은행잎들이 순식간에 수많은 군마로 변하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은행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에 그리 크지 않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역시 한 움큼 잎을 훑어 훅 하고 불고 뭐라고 주문을 외니, 이번에는 아카시아 잎새들이 삽시간에 군사로 변하고 만다. 이런 정경을 바라보던 부인은 경탄하여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바로 그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마귀할멈이 나타나 주문을 외며 뭔지를 뿌려댄다. 그 순간 득실득실하던 군마와 군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 순간 곽경 장사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바로 오늘이 마감산의 정기를 타고 삼 년을 다 채우는 도술을 마치는 날인데 마귀할멈의 방해로 삼 년을 못 채우고 아쉽게도 세상을 떠나버렸다.

삼 년을 하루같이 닦아온 도술이 삼 년을 다 채우는 마지막 날 마귀할멈의 방해로 무너지고 곽경 장사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던 날 마감산의 용마가 강변까지 나와 슬피 울었다 하며, 강변 바위에는 장수 발자국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그 바위를 ‘장수바위’라 부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험하기로 이름난 산고개가 있다. 어느 날 누나와 남동생이 산너머 친척집을 가기 위해 험한 이 산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남동생은 이제 막 17살을 넘어섰고 누나는 두어 살 위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서로 손을 잡아주며 산고개를 넘어가는 이들을 마귀할멈이 느닷없이 검은 먹구름을 몰아다가 소나기를 퍼붓는 게 아닌가. 억수처럼 내리는 비를 피하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니 저만치 집채만 한 바위가 있어 부리나케 그리로 가서 남매가 서 있자니, 비에 젖은 누나의 몸을 본 남동생은 이상한 감흥이 일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차마 누나 옆에 서 있을 수가 없어 슬며시 바위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욕정이 솟구치는 남근(男根)을 사정없이 돌을 들어 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어느 때쯤일까 정신이 아득해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퍼붓던 비도 멎고 한참을 기다려도 동생이 돌아오지를 않자, 동생을 찾아 바위 모퉁이를 돌아서던 누나는 아연실색하며 자지러지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돌아간 부모님들이 애지중지하게 길러온 동생이었건만 선혈이 낭자한 채 죽어가고 있지를 않은가!

바로 이때 촌로 한 분이 저만치 지나간다. 동생을 살릴 욕심에 부끄러움도 무릎 쓰고 달려가서 도와줄 것을 간청하니 쾌히 승낙을 한다.

가까스로 동리 정자까지 옮겨다 놓고 어쩌면 좋겠느냐고 촌로에게 물으니 읍내에 가서 서둘러 의원을 불러오라는 것이다.

의원을 불러올 동안 동생을 간호해달라고 맡기고 오던 길이 싫어 도전리 고개를 넘어 잽싸게 걷는 걸음걸이건만 발길은 웬지 더디어 산고개를 겨우 넘어서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바로 운촌리(雲村里) 부락을 누나가 당도하자 날이 어두웠다 하여 이곳이 ‘어둔’이라는 것이다. 남자 걸음으로 걸으면 불과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죽어가는 동생을 생각하여 갈 듯 말 듯 망설이며 오다보니 어느덧 새벽닭이 울어 닭모루라는 곳이 북내면 당우리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읍내쪽으로 얼마 안 와 날이 새어 신남리를 ‘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읍내에 와서 의원을 데리고 도전리 고개를 넘어 어느 마을을 앞에 당도하니 벌써 이곳까지 소문이 퍼져 정말 살아나긴 틀렸니 하던 데서 이 부락을 ‘전거론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귀할멈의 심술로 인해 순박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남매들이 겪었던 비극을 잊을 수 없어 행동을 다사려 행치(行治)라 하던 것을 행치(行峙) 고개라 부르기도 하고, 돌멩이로 비명에 갔다 하여 ‘동막골’이라는 산고개와 골짝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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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