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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전경
아직, 동녘 하늘이 희부연하게 밝아올 무렵이었다. 길 떠날 차비를 마친 젊은이는 희미한 방문 앞에 잠깐 동안 머물러 나직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어머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몸 성하시기를 빕니다.”
“애야, 내 걱정일랑 말고, 조심해 잘 다녀오너라. 과거를 보러가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럼 어서 다녀오너라.”
젊은이는 괴나리봇짐을 고쳐 매고 돌아섰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사립문을 열고 길에 나섰다.
밝아오는 햇살을 등에 지고 젊은이는 길을 재촉했다. 강을 따라 하류를 향해 걸었다. 갈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었다. 젊은이는 못내 어머니의 꿈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노상 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였지만 막상 과거를 치르러가면서 늙은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마음을 어둡게 했고 게다가 꿈은 어쩐지 불길한 징조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젊은이는 강가에 내려가 저고리를 벗고 얼굴을 씻었다. 한결 상쾌하였다. 그러나 시장기를 느낀 젊은이는 물가에 앉아 싸온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난 젊은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길을 걸어온 피로와 식곤증과 수면부족이 그를 잠속으로 이끌어갔다.
젊은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강물 위로 햇빛은 눈부시고 따스하게 내려 쪼이고 있었다.
“참, 이상도 하다. 꿈을 꾼 것 같은데 전혀 생각이 나질 않으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얽힌 의혹이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문득 첨벙하고 물고기가 강심에서 뛰어올랐다. 젊은이의 눈이 빛났다.
“그렇지. 강심에서 일어난 일이었지. 강심에서…”
젊은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 여자가 있었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젊은이는 아직도 꿈속을 더듬으며 괴나리봇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순간, 섬광과도 같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 그렇지. 봇짐 속을 보자!”
봇짐 속에 한 마리의 구렁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젊은이는 비로소 꿈속에 일어난 일을 기억해 냈다. 꿈속의 젊은이는 나이 어린 동승이었다.
동승은 스승의 심부름으로 강을 건너가야 했다. 나루터의 뱃사공은 험상궂은 사나이였다.
동승은 짐 속에서 엽전꾸러미를 꺼내 배삯을 치렀다. 그 돈 꾸러미를 본 사공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너, 그 돈 어디서 난 거냐? 쪼그만 상좌중놈이 어디서 그 많은 돈이 생겼지? 바른 대로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관가에 고해바칠 테다.”
“이 돈은 보은사를 중창할 시주 돈이에요. 저의 노스님께서 강 건너 대장간에 가져다주래서 가는 겁니다.”
사공은 동승을 태우고 배를 강심으로 밀어내려 했다. 그때 뛰어오는 한 여인이 나룻배를 불렀다.
“안돼요. 배를 벌써 띄웠으니, 다음 차례를 기다리시오.”
“기왕이면 함께 가는 것이 사공에게도 힘이 덜 들어 좋지 않습니까? 배를 기슭에 대시오.”
동승이 말했다.
사공은 하는 수 없이 배를 기슭에 대고 여인을 태웠다.
“고맙습니다. 스님.”
여인은 동승을 향해 인사를 했다.
여인은 동승을 향해 돌아앉았다.
“스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소승은 강 건너 대장간이 있는 마을까지 갑니다. 이번에 저희네 절을 중창하기 위해서 연장을 맞추러 가는 길입니다.”
“아, 절을 중창하시면 시주를 걷으시겠군요. 어느 절입니까? 제 집도 강을 건너서 얼마 멀지 않으니 함께 가주시면 저도 시주를 하고 싶어요.”
두 사람의 수작을 잠자코 듣고 있던 사공이 갑자기 노를 들어 여인을 후려치면서 외쳤다.
“이 요사스러운 년아, 왜 하필이면 스님을 꼬이느냐!”
사공이 내려치는 노를 피해 물속으로 뛰어든 여인은 금방 한 머리 커다란 암구렁이가 되어 달아났다. 그 서슬에 젊은이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젊은이는 봇짐을 챙겨 어깨에 둘러맸다. 그리고 길을 재촉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그는 나루터에 닿았다.
나루터에는 한 사람의 늙은 사공이 빈 배에 앉아 있었다.
“노인장, 나루를 건너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젊은이는 이렇게 늦게 어디를 가십니까?”
사공이 삿대로 배를 밀어내며 물었다.
“과거를 치르러 가는 길입니다.”
“나루를 건너가면 인가가 없는데 어디서 유하실려고?”
젊은이는 그때서야 사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모양은 어찌 보면 꿈속의 사공과 닮은 것도 같았다.
“하, 이상한데… 늘 이 나루를 건너 강 건너 장에를 다녔는데 인가가 없다니… 노인장께서는 이곳에서 얼마나 나룻배를 부리셨습니까?”
“나요? 나는 이 나루터에서 태어나 늙었지요.”
“그러면 이곳은 여강나루가 아닙니까?”
“여강나루야, 여강나루지. 그러나 젊은이는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소. 새벽에 집을 나설 때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이오.”
“네? 길을 잘못 들다니요?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소. 젊은이는 오늘 낮에 강가에서 암구렁이를 보았지요? 이 길은 저승으로 통하는 길이오. 이 나루를 건너면 보은사가 있지만 누구도 이 나루를 건너 살아서 보은사에 닿은 사람은 없소.”
“그러면, 노인장 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죽은 것입니까, 산 것입니까?”
“천만에 죽지는 않았소이다. 다만 젊은이의 효심 때문에 이 길에 이른 것이오. 젊은이가 그토록 위하던 어머니는 오늘 새벽 젊은이가 떠나자 곧 숨졌소. 그래서 지금은 보은사의 나찰(羅刹)이 되어 있는데 보은사가 너무 퇴락하여 젊은이의 어머니가 거처할 곳이 없소. 그래서 어머니는 절 아래 있는 동굴을 거처로 삼았소. 그런데 그 동굴에는 백사녀(白蛇女)라는 마귀가 살고 있었소. 당신 어머니께 집을 빼앗기니까 화가 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것이오. 다행히 나루를 지키는 나한에게 들켜 백사녀는 당신을 해치지 못했소.”
“그러면, 꿈속의 동승은 누굽니까? 그 동승은 접니까?”
“그렇소. 그것은 당신의 전생 모습이오. 당신은 전생에 보은사를 중창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도 지금까지 이행하지 않고 있소. 오늘 당신에게 이런 기회가 있는 것도 모두 보은사 부처님의 계시인 것이오.”했다.
홀연 젊은이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둠 속의 강기슭에 혼자였다. 그는 삼십 리의 무인지경을 지나 보은사에 이르렀다. 젊은이는 보은사를 돌아보고 어머니의 영전에 제사를 지낸 다음날 장안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물론 젊은이는 장원 급제하여 여주 고을의 원님이 되었고 나라에 상주하여 보은사에 큰 역사를 일으켜 중창했다.
때는 성종 4년, 대왕대비의 특명으로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여강 동쪽 봉미산에 있던 보은사를 중창하고, 부처님의 신탁으로 중창한 절이라 해서 신륵사(神勒寺)라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륵사 앞의 탑 밑에는 나찰이 된 그 젊은이의 어머니가 지금도 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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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