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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보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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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보린사(畿東保隣社)는 여주 역사 이래 최초의 재단법인이었다. 그것도 어느 개인의 영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주군민을 위한 공익법인체였다. 기동보린사가 창립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민응과 같은 독지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926년 12월 당시 여주군수로 있던 문태선(文泰善)과 흥천면 외사리에 살던 이민응은 서로 상의하여, 주민들의 생활안정과 농촌진흥을 목적으로 재단법인 기동보린사를 창설하기로 합의하였다. 먼저 이민응은 그의 아들 재정(載正), 조카 재경(載敬)과 함께 솔선수범하여 쌀 1,000석을 내놓았다. 이민응은 당시 춘궁기 때 고리채무로 시달리던 빈민들의 삶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을 구제할 방법의 하나로 거액을 출자한 것이다. 그래서 이민응 일가에서 내놓은 출자금을 바탕으로 기동보린사를 조직한 뒤 춘궁기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싼 이자로 빌려주는 빈민구제사업을 펴게 되었다.

 

특히 최영락(崔永洛)·최진원(崔眞源) 등 여주지역 유지 561명도 함께 출자하였다. 이들 유지들이 출자한 금액은 1,800석으로, 기동보린사의 총출자기금은 2,800석에 이르렀다. 이렇게 막대한 기금을 확보한 기동보린사는 매년 춘궁기 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종자와 학자금을 저리 또는 무이자로 대여한 뒤 추수 뒤에 갚도록 하였다. 또한 기동보린사는 기금이 완전한 궤도에 오르게 되자 1934년에 여주읍 하리, 지금의 여주농고 자리에 여주농도강습소(驪州農道講習所)를 창설하여 농촌의 지도자를 교육양성하고 당시에 낙후되었던 농촌진흥관계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당대의 혁신적인 사업으로, 이민응의 업적은 후세에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치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1940년도에는 기동보린사 창립기념비가 세워졌는데, 비신의 높이는 168㎝, 폭은 55.5㎝, 두께는 27㎝이다. 개석은 높이 38㎝, 폭 95㎝, 두께 65㎝이다. 원래 이 비는 여주군청에 있었으나, 1978년 당시 여주군 청사를 신축하면서 영월루 아래로 옮겨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문은 모두 4면으로 되어 있는데, 앞면에는 기동보린사의 성립경위와 그 의의를 밝혀 놓았다. 양 측면과 뒷면은 기동보린사 창립에 관계한 지역유지명단이 열거되어 있다. 지역유지는 이민응·김기제(金基濟)·차정기(車正基)를 비롯해 각 면별로 총 565명의 성명과 신륵사가 음각되어 있다. 이 명단은 당시 여주를 움직이던 유지집단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문 중 ‘소화(昭和)’라는 일본연호는 누군가에 의해 인멸되어 있으며, 비의 설립자를 명기한 앞면의 비문 끝 역시 ‘조선’과 ‘군수’ 사이의 세 글자와 김수명 군수의 ‘김’자와 ‘수’자 사이 한 글자도 마멸되어 있다. 세 글자는 ‘총독부’(總督府), 한 글자는 ‘공’(公)자로 보인다. 이는 기동보린사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해방 이후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저항의 한 표시이기도 하다.

기동보린사 창립기념비문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기동보린사 창립기념비문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

財團法人 畿東保隣社 創立紀念碑

昭和二年十二月故郡守文泰善及有志李敏應兩氏相議而創立畿東保隣社此卽爲細農之生活安定及農村之振興也李敏應氏與其胤載正及其姪載敬率先出資租一千石崔永洛崔悳源有志五百六十人繼續出資一千八百石總計二千八百石也每際春窮以低利貸付于農糧不足者使之離脫高利負債如古代義倉之制而其効實不遜於昔日也伊來郡面當局無給而勤務因公而處事每年得利元本亦殖昭和九年以剩餘之財創設驪州農道講習所敎養農村指導者且農村振興關係事業施行矣就中農糧貸付制度及農民養成機關之二者新政以來初有之擧而自本郡創始者也此豈非賞讚之大者歟於是余新以來或添或補以圖內容充實基礎鞏固乃使出資各位贊同寄附行爲仍成財團法人又以農道講習所設立名義變更以驪州郡鄕校財産因爲公立之本唯其經費負擔而內容改善也盖此美擧因當路者之意圖然李敏應氏一門之率先寄付爲此擧之嚆矢而從此有志續出竟至寄附之完成此是官民協力之所致也而五百有餘之篤志擧郡所以不可忘者也今我朝鮮農村之社會事業未嘗不多然其旨其規恐未有過於此者也乃立此碑列記芳名以爲永世之記念云爾

昭和十五年 月 日

朝鮮○○○郡守 金○秀明

* ○는 마멸된 글자로 앞의 세 글자는 總督府, 뒤의 한 글자는 公자로 보인다.

번역문

재단법인 기동보린사 창립기념비

1926년 12월 고(故) 문선태(文泰善) 여주군수와 이민응(李敏應) 유지는 서로 상의하여 기동보린사를 창립하였으니, 그것은 곧 영세농민의 생활안정과 농촌진흥을 위해서이다. 이민응은 그의 맏아들 재정(載正), 조카 재경(載敬)과 함께 솔선하여 벼 1,000석을 출자하였고, 곧이어 최영락(崔永洛)·최진원(崔眞源) 등 561명의 유지들이 1,800석을 계속 출자하여 출자 총계는 2,800석에 이르렀다.

기동보린사는 매년 춘궁기마다 종자가 부족한 농민들에게 저리로 대부하여 고리부채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니, 그것은 고대의 의창제도와 같으며, 그 실효가 옛날과 다름없었다. 기동보린사 창립 이래 군면 당국의 지원 없이 공평하게 부지런히 사무를 처리하였고, 매년 이자가 늘어나 원금 또한 증식하였다. 그래서 1934년에는 잉여 재원을 가지고 여주농도강습소를 창설하였다. 농도강습소에서는 농촌지도자를 길러내고 농촌진흥관계사업을 실시하였다.

그와 같은 사업 중에서 종자대부제도와 농민양성기관 두 가지는 1910년 이래 처음 있는 일로 여주군에서 창시한 것이다. 그 어찌 크게 칭찬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 부임한 이래 혹은 첨가하고 혹은 보태어 내용이 충실하고 기초가 공고하도록 도모하였다. 이에 그동안 출자한 여러 유지로 하여금 기부행위를 찬동케 하여 이내 재단법인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농도강습소 설립 명의를 여주군향교재산으로 변경하여 공립의 기반으로 삼은 뒤 경비만 부담하게 하고 내용을 개선하였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일은 당로자의 의도이긴 하나, 이민응 일가가 솔선하여 기부한 것이 그 효시를 이루었고 그것을 본받아 유지들이 계속 출자 기부하여 그 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관민이 협력한 소치이자, 500여 명의 독지가들을 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우리 조선 농촌의 사회사업은 일찍이 많았으나, 아마도 그 취지와 규범에 있어서 기동보린사만큼 큰 것도 없으리라. 이에 이 비를 세우고 명예로운 성명을 차례로 기록하여 영세의 기념으로 삼고자 한다.

1940년 월 일

조선○○○군수 김○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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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