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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의 미군정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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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경 여주를 점령한 미군은 제24군단 제7사단 휘하의 병력이었다. 미군의 전술점령군은 야전부대로서 해당 지역의 군사적 점령을 책임지는 부대였으며, 곧이어 민간 행정을 담당할 군정부대가 진주하였다. 군정부대는 도 단위에 군정단(Military Governor Group), 시·군 단위에 군정중대(Military Governor Company)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 군정중대는 서너 곳의 시·군을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 군정중대는 주간 단위 보고서를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했는데, 여주를 담당했던 군정중대는 서울을 포함해 경기도를 담당했던 제7사단 산하의 제97군정단으로 추정한다. 10월경 여주에 제97군정단 휘하 숀슨 중위를 소대장으로 하는 미군의 1개 소대가 진주했다. 당시 이천지역에는 와그너(Wagner) 대위를 중대장으로 한 100여 명의 미군이 진주했는데, 아마도 이 중대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숀슨 중위의 1개 소대는 한동안 여주 내의 ‘가기모도’ 여관에 체제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고, 곧 보드만 중위가 5~6명의 미군을 이끌고 군정관으로서 여주에 정식 부임하였다. 진주한 미군은 당시 여주군청에 주둔했다. 군정부대의 통역관은 여주군 초대고문 겸 보건사회과장을 역임했으며, 우익계열의 대한청년회 여주시단 부단장이자 한국전쟁시 미9사단 민사처 병원장을 지냈던 김윤선이 담당했다. 군청의 군수실에서 업무를 본 군정관의 당면과업은 행정력 및 경찰력의 조속한 복구와 민심 수습이었다. 보드만 군정관의 첫 사업은 여주 행정 책임자, 즉 군수의 추천이었다. 그는 여주군청 직원들에게 군수 적임자를 추천케 하였고, 2~3명의 후보자 중에서 각계의 여론을 참작한 후 산업과에 있던 민옥인을 군수로 내정하였다. 또한 내무과장에는 해방 직전 용인에서 온 이달식, 산업과장에는 구봉희, 보도후생과장에 김윤선을 내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달식 내무과장은 서울로 가고 내무과장 서리로 곽종석이 내정되었다.3)

 

이러한 군정관의 행정력 및 경찰력의 조속한 복구과정과 민심수습과정에서 당시 우익계열의 여주치안유지단은 긴밀한 연락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러나 현지사정을 잘 모르는 군정관과 광복의 열정에 휩싸여 있던 여주지역인과의 사이에 마찰이 없을 수 없었다. 이것은 여주시 경찰서장의 선임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당시 여주치안유지단에서는 읍내 유지들을 모이게 한 후 민선 경찰서장을 투표로 선출케 하였다. 이 결과 여주 토박이자 거상인 석광태가 서장으로, 전직 수사계 차석으로 있던 이충녕을 부서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이때 해방 직전까지 여주경찰서 수사주임으로 있던 채모라는 사람이 경기도청에서 여주경찰서 서장의 사령장을 가지고 와 내가 진짜 서장이라고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루 아침에 두 명의 서장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

보드만 군정관은 법치국가로서, 더구나 현시는 군정이 실시되는 때이므로 상부에서 임명한 경찰서장을 신임할 수밖에 없다며 민선을 통해 선출한 석광태 서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런데 김윤선의 회고에 의하면 “채씨라는 사람은 인품이 가볍고 평소에도 일본말만 사용하고 심지어 일본 하가마(여름옷)와 도데라(겨울옷)만 걸치고 게다짝을 끌고다니는 친일파로서 자기집 마루에다 가미다나(일본 신주)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손뼉을 치며 묵념을 올리는 괴짜였으므로, 이런 자가 해방 후 초대 경찰서장으로 부임했으니 여주의 인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그야말로 요사이 같으면 데모 소동이라도 일어날 판이었다”고 전한다. 즉, 채모라는 인물은 친일 계열의 인사로 여주에서 민심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경찰서장 임명을 둘러싸고 보드만 군정관과 치안유지단의 의견대립이 커졌다. 여러 가지 설왕설래 끝에 통역을 담당했던 김윤선의 병원에서 보드만 군정관, 구종태 치안유지단장, 곽종석 내무과장 4인이 회합하여 최종 교섭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상부의 임명을 받았다고 하나 어제까지 여주군민의 빈축을 사던 친일파가 해방을 맞이하여 희망에 부푼 여주의 초대 서장이 된대서야 여주군민이 단연 용서할 수 없다”고 치안유지단 구종태 단장이 강력히 주장하고, 또 김윤선 보도후생과장 등이 이를 지지하면서 결국 보드만 군정관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상부에 여주읍내의 유지들이 선출한 석광태를 여주경찰서장으로 정식 추천 보고하였고, 경기도경에서 사령장을 가져왔던 채모 서장은 이날 밤 여주를 떠났다고 한다.4)

 

위와 같은 사실 외에 여주군을 담당한 미 군정관의 구체적 군청업무나 활동상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인근 양주군(楊州郡)과 광주군(廣州郡)을 담당했던 군정중대의 보고서를 통해 그 대략적 활동상을 추적할 수 있다. 두 지역의 미 군정중대가 했던 주요 활동상은 1946년 4월경까지 대체로 ①복지, ②민간구호를 위한 군정보급, ③노동, ④보건, ⑤적산, ⑥광산, ⑦어업, ⑧민간 행정 개황 등으로 구분되다가, 1946년 4월 29일부터 ①개관, ②경찰, ③외사(外事), ④농업, ⑤상업, ⑥재정, ⑦통신, ⑧교통, ⑨교육, ⑩공보, ⑪적산관리, ⑫보건복지, ⑬기타 등으로 변하였는데, 여주도 이러한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농촌지역 군정부대의 주요활동은 추곡(秋穀) 및 하곡(夏穀) 수집, 비료 배급, 4-H교육, 산림 녹화, 관개, 식량 배급 등이었다.5) 특히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당시 심각했던 식량 문제 등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당시 남한 사회는 해외로부터 귀환민(歸還民)의 급격한 유입과 분단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 일본과의 단절 등으로 경제적으로 극히 곤란한 상황에 있었다. 특히 도시지역의 식량문제는 식량폭동을 야기할 정도로 심각했기에 미군정의 급선무는 도시지역의 안정을 위한 농촌으로부터의 식량 확보였다. 사실상 미군정기에 일어났던 노동쟁의, 폭동, 총파업 등은 생활상의 요구라는 측면에서 많은 경우 식량 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으며, 식량 문제는 식량의 수급 차원을 넘어서 미군정하 사회경제 체제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입증하는 손쉬운 지표였다. 따라서 미군정에게 노동자를 비롯한 도시민에 대한 식량의 확보와 배급은 사회체제를 안정시키고 미군정의 정당성을 입증시켜 주는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6)

 

여주는 서울에 인접한 식량생산 지역이라는 특성상 미군정 공출정책의 우선 집행대상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경기도내 시장·군수회의를 개최하여 ‘미곡 강제 수집령’을 발동했으며, 추곡 및 하곡 공출을 독려하는 미군정부대의 공출 강행은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켰다. 여주의 경우, 1946년 가을부터 군정에서는 추곡을 수집하여 농민들의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좌파계열에서는 미군정의 공출 강행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 광범한 농민층의 지지를 얻어 나갔으며, 농민들도 일제 때 시달렸던 공출이란 잠재의식 때문에 이에 협력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대부분 농민의 사정이 식량 공출에 응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여주군의 식량 공출 수집 성적은 다른 군에 비하여 저조하였다.

 

특히, 여주 10개 읍면 중 흥천면(興川面)의 성적이 유난히 좋지 않았다. 흥천면은 이천군과 접경한 면으로 많은 이천 군민들의 경작지가 이곳에 있으면서 실지 수확된 곡물은 이천군으로 공출하였던 관계로 소위 출입작(出入作)으로 인한 흥천면의 손실은 컸으나 군정관은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정초를 일 주일 앞두고 경기도 군정관인 와그너 소령은 여주군수 이하 전직원을 불러놓고 “오늘부터 일 주일의 말미를 주는 것이니 그 기한에 흥천면 추곡 수집을 완료하라.”고 하며, “만일 책임 완수를 못하면 전원 유치장행”이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당시 항간에는 우는 아이들도 와그너 소령이 왔다 하면 울음을 그쳤다는 일화까지 떠돌았고, 군청 직원들이 군정관인 와그너 소령을 공적인 업무로 만날 때에는 으레 호흡을 하는 습관이 있을 정도로 그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날부터 여주군수 이하 전직원이 총동원되어 흥천면으로 출장,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집 독려에 힘썼다.7)

 

식량문제 해결 외 미군정이 심혈을 기울인 것 중의 하나가 당시 심각했던 식량제와 관련한 전재민(戰災民) 구호 문제였다. 해방 직후 수백만 전재민이 귀국하였는데, 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지역별로 주택건설을 할당해 전재민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그 일환으로 1946년 11월 22일 경기도 후생국에서는 전재동포(戰災同胞)를 위한 주택건립 문제를 토의하고 여주에도 10호의 주택건설을 결정하였다.8)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여주에서도 수많은 전재민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전재민들에게는 도에서 전달되는 구호금이 약간씩 분배되었으나 제한된 구호금으로 그때그때 분배해준다는 것은 “받는 사람은 시덥잖고 주는 측도 헛수고만 하는 셈으로 그야말로 걸인을 양성하는 격”이었다.

 

당시 경기도 후생국의 결정에 따라 경기도에서 여주군으로 10호분의 구호주택 자금이 오게 되었다. 김윤선 보도후생과장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그는 이병재 군수와 함께 “자조자활(自助自活)의 정신을 일깨우는 데는 한 가족이 단위가 되어 일정한 토지에 정착시켜 부부 협조하에 생산에 힘쓰는 길이 진정한 구호사업”이라는 것에 합의하고, 여주의 유지인 신복성의 도움을 받아 대초중학교 소유로 있는 후포리(後浦里) 강변사장을 수만 평 빌렸다고 한다.

 

또한 경기도청에 가서 앞으로의 계획과 사업의도를 설명한 후 제97군정단장이자 경기도지사인 찰스 앤더슨(Charles Augustus Anderson) 중령으로부터 사업에 대한 지지를 받아 추가 주택자금 25호분(당시 1호당 5,000원)을 얻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여주 북단에 위치한 대신면의 새마을에 입주할 대상선정에 착수하였는데, 강원도를 비롯하여 각 도에서 입주 희망자가 쇄도하였다. 당시는 늦가을이라 주택(토담집) 공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경기도에 교섭하여 대형 천막을 지원받아 세우고 의류 등 구호물자를 이곳에 투입하였다. 입주자 선정과 천막의 부설, 기타 최소한의 월동대책을 마련한 후 이병재 군수는 새로운 마을을 ‘풍양구락부’라고 명명하고, 간판까지 작성하여 중앙의 요로인사와 지방인사가 모인 가운데 성대한 입주식을 거행하게 되었다.9)

 

또 하나 미군정이 심혈을 기울인 것이 농촌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사업이었다. 그 일환으로 경기도지사인 찰스 앤더슨에 의해 1947년 초반 수립된 ‘4-H’ 조직의 설립계획에 따라 1947년 3월과 4월에 걸쳐 경기도 내에 약 50명씩 20개의 ‘4-H구락부’가 창설되는 등 4-H조직이 경기도지역에 확산되었다. 여주의 경우 찰스 앤더슨 군정관이 직접 시찰을 나와서 4-H조직의 창설을 독려하였다. 특히 금사면의 경우 4-H조직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최병두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찰스 앤더슨 군정관은 금사면의 ‘민참판댁(민병순)’ 집에 머물면서 4-H조직 창설과 관련하여 시찰·독려하였다. 당시 금사면에는 군속 행세를 한 신충현 등 남녀 20~30여 명이 조직되었으며, 이포리의 경우도 최병두의 동생인 최병상이 책임자로서 활동하였다. 금사면의 4-H조직은 면의 권업 주임이 담당하였으며, 경기도에서 담요나 내복 등의 잉여 군수 물자를 지원받아 농촌의 청년들을 조직하며 녹화사업 등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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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