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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토대의 붕괴와 전후 부흥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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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경제적 토대의 붕괴를 가져왔다. 전쟁의 물적 피해는 남한만도 약 4,123억 환에 달했는데, 이는 1953년도 GNP 2,300억 환의 1.8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1)

이 가운데 산업분야에서의 피해는 특히 제조업부문에서 두드러졌다. 제조업은 생산시설물에 크게 의존하는 산업인데, 그 주요 생산시설이 전쟁의 피해가 특히 심했던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 전선(戰線)이 고착된 후인 1951년 8월의 기획처 집계를 살펴보면, 금속·기계·화학·섬유·요업·식품·인쇄 등 7개 주요 제조업의 총피해액이 1억 달러를 상회하여 전쟁 전에 비해 건물은 44%, 생산시설은 42%의 피해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피해는 생산수준에 그대로 반영되어 1951년도 공산(工産) 총액이 전쟁 직전인 1949년의 52%로 급감하였다.3)

당시 여주지역의 산업 피해만을 정리해보면 아래 두 표와 같다.

 

여주군에 위치한 공장·회사 등 일반사업체의 피해 건수는 총 12건으로 피해총액이 3억 환을 넘고 있었다. 도정공장의 경우는 전체 116개 가운데 약 30%인 34개가 전파(全破) 혹은 반파(半破)되었고 그 피해액만 약 6천만 환에 달하고 있는데, 이는 여주군이 농업지역임을 감안할 때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손실이라 하겠다.

 

한편, 여주군에 위치한 일반주택과 정부기관건물, 학교건물, 농회창고, 금융조합건물, 종교단체건물 등 공공시설의 피해상황은 아래 표들에서 정리한 바와 같다.

 

이 가운데 일반주택의 경우는 의식(衣食)과 함께 민생문제에 직접적 관련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여주지역에서는 전쟁이 안정기로 접어든 뒤 최우선의 전후복구사업으로 주택건설을 선정하고 이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였다. 당시 경기도의 주택피해는 특히 심각하였으므로 UNKRA(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유엔한국재건단)에서도 우선 막대한 원조자재를 무상 공급하여 ‘후생주택(厚生住宅)’이라는 명칭하에 경기도에 1952년도 2700호(여주군 125호), 1953년도 4700호(여주군 100호)를 건설하였다. 응급구호가 점차 줄어들고, 재건사업이 좀더 체계적으로 되어가자 주택 역시 유상원조에 의한 복구로 변해갔다. 그리하여 1953, 1954년도에는 운크라 원조자재로 9~12평의 주택을 건설하되 공사비는 입주자가 전담하고, 자재비는 8년간 연부상환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이후 입주자의 경제난을 고려하여 정부에서 공사비로 1년당 30만 환의 융자금을 지급하여 4년간 연부상환케 하고, 자재비 역시 8년간 연부상환하게 하였다. 그 결과, 1955년의 통계로 여주지역은 전체 전재호수 2,996호의 35%인 1,043호가 복구되었고, 경기도 전체로는 전체 전재호수 8만 5,503호의 36%인 3만 817호가 복구될 수 있었다.

 

한편 정부는 이와 같은 주택문제 등 당면과제의 점진적 해결과 함께, 좀더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전후경제부흥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하였듯, 전쟁으로 인한 전국적인 생산여건의 파괴와 그에 따른 생산수준의 저하는 생활경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실은 전쟁의 장기화, 전국(戰局)의 안정화와 맞물리면서 ‘일면전쟁 일면부흥(一面戰爭 一面復興)’이라는 구호 출현의 배경이 되었고, 정부는 전후 재건을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만 했던 것이다.4)

 

그러나 경제재건을 수행함에 있어 전시(戰時) 인플레이션은 무엇보다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비(戰費) 조달로 인한 재정적자가 천문학적으로 증가했고,5) 산업기반의 파괴로 생산은 급감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직적인 물가상승은 저하된 생산활동을 더욱 위축시켰다. 생산활동보다는 감가(減價)를 방지하기 위한 유통과정에서의 투기적 상행위를 자극하여 생산과 유통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였던 것이다. 또한 통화가치의 폭락 때문에 정부가 예산집행을 계획대로 실시할 수 없었으므로 정상적인 정책활동을 좌절시키고 있었다. 이는 전후경제계획 자체에 지장을 주었다. 1953년 2월 14일의 통화개혁(通貨改革)6)과 관련한 다음의 설명은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시장의 왜곡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물자의 공급을 독점하여 독점가격을 최대한으로 형성시킴으로써 부익부를 기하고 이 독점작용의 반복으로 인한 독점이윤에 의하여 급속히 증대된 일부 전시 이득층에 편재된 과잉 구매력은 시장의 대부분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증대되었다.7)

전쟁피해로 인한 생산력의 저하와 전비 증대로 말미암은 통화의 팽창 때문에 물가사정은 악화되었고 일정한 화폐 소득자의 실질소득은 다달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부익부빈익빈의 징후는 농후해 가서 원재료와 제품은 사장되고 생산의욕은 떨어지고 반면에 고리대금업자만 발호하여 또 일면 가치를 제대로 한장한장 세어보지를 않고 돈의 분량을 대충 달아서 주고받고 하는 천금사상이 흩어지고 지폐의 홍수 속에서 거래의 단위만 터무니 없이 불어서 유통과 결제상에 많은 불편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8)

 

결국 물가안정이라는 전제하에서 전후 재건사업이 진행되어야 했고, 이러한 조건은 전후 기업민영화(企業民營化) 논의가 자연스럽게 활성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정부재정지출을 줄이는 대신 재건사업에 민간자본을 최대한 동원해야 물가상승도 억제하고 경제부흥도 가능하다는 기업민영화 논리는 부흥사업 재원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미국의 입장이기도 했다.

 

남한의 전후 경제재건 방향이 기업민영화원칙에 입각하여 설정된다는 것은 곧 민간자본(자본가)의 ‘육성’을 의미했다. 재건·부흥사업의 투자방식은 한정된 물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야 했기 때문에 투자부문과 자본의 집중화가 필연적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자본의 계획적·집중적 투하로 사업을 진행하는 가운데 필수부문에 대한 투자를 민영화의 방향에서 기획한다면, 이는 결국 향후 이들 민간자본에 대해 계획적이고 집중적인 육성과 보호를 보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전후 재건·부흥사업의 방향 속에서 자본가 본위의 경제운영방안이 전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후 경제정책의 맥락은 분단과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48년 한반도에는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남한정부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정부가 각각 출범하였다. 그러나 일제하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일정 이상의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적 공감대 속에서, 남한 정부조차도 그 수립 초기부터 전면적인 ‘자유경제(自由經濟)’를 표방하지는 못했다. 즉, 전쟁 이전의 초기 이승만 정권에서는 그 체제가 지니고 있는 자유주의적 경제운영의 내용이 아직 구체화되지 못한 채 잠정적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계기는 일련의 전후 재건·부흥사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듯, 전쟁으로 기존 생산기반의 대부분이 파괴되자 정부는 막대한 물자가 투입되는 전후 재건·부흥사업을 추진해야 했고, 이에 따른 개별적 사업계획과 실무적인 세부방침 등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의 실행과정 속에서 이승만 정권의 자본가 육성정책 등 구체적인 자본주의적 경제운영 모습이 비로소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남한의 전후 경제재건 방식은 북한의 사회주의적 개혁재건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분단과 전쟁의 원인이 ‘새로운 사회’를 구성·운영하는 ‘생각의 차이’에 있었음을 연역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전쟁은 체제적 분단의 모습을 더욱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계기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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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