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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조직의 성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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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인연에 근거를 둔 문중조직의 형성은 입향조(入鄕祖)의 입향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조직의 정점 또는 구심점은 부조(不祧)의 묘(廟), 즉 4대봉사 이후에도 계속 기제사로 모시는 조상이나 입향조의 묘(墓)가 된다. 입향의 향(鄕)의 단위는 마을이 아니라 군·현(郡·縣)이다. 실제 한 동족촌락을 놓고 보면 입향이라기보다는 분가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분가를 통해 마을에 처음 주거를 정한 자가 따로 조직의 정점이 되는 것은 분파가 이루어진 이후의 일이다.

센세이류조[善生永助]는 『조선의 취락(朝鮮の聚落)』에서 다음과 같이 동족집단 발생연혁을 10가지로 나누었다.

  1. ① 그 지방의 세력 있는 자가 부근에 적지(適地)를 선택하여 전거(轉居)한 것.
  2. ② 그 지방의 세력 있는 집의 자손이 부근에 분가하여 그것이 발전한 것.
  3. ③ 중앙의 관직에 있었던 자가 적지를 선택하거나 또는 관에서 토지를 받아 은퇴(隱退) 정주(定住)하여 그것이 발전한 것.
  4. ④ 인구가 조밀한 남부지방으로부터 인구가 희박한 서부 및 북부지방으로 일족 또는 일가가 이주하여 개간·개척하여 그 자손이 번영한 것.
  5. ⑤ 지방관을 지낸 자가 관직을 물러난 후, 그대로 정주하거나 또는 수년 후 다시 와서 정착하여 그 자손이 번영한 것.
  6. ⑥ 불평을 품고 산간으로 은둔하거나 또는 죄를 지어 유적(流謫)되어 그대로 정착한 자의 자손이 발전한 것.
  7. ⑦ 전화(戰禍)를 면하기 위하여 피난한 후 귀향하지 않고 그대로 정착한 자의 자손이 발전한 것.
  8. ⑧ 갑(甲)이란 씨족이 발전한 촌락에 을(乙)이란 씨족이 들어와 갑을 상호 또는 갑·을·병의 씨족이 같이 발전한 것.
  9. ⑨ 갑이란 씨족을 쫓아내고 을이란 씨족이 발전하거나 또는 이전에 있던 씨족이 쇠미(衰微)해지고 새로운 씨족이 발전한 것.
  10. ⑩ 선조의 분묘를 지키기 위하여 묘막(墓幕)을 짓고 살던 자의 자손이 번영한 것.

그러나 이 사례들은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지 않거나 시대적 편차에 대해 무관심하다. 또한 입향 동기는 주로 후손들에 의해 미화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이러한 예시는 단편적 자료의 모음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에는 가상적인, 또는 허구적인 요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위의 입향 사례들을 다시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입향한 경우다.

둘째는 첫째와는 반대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자가 입향한 경우다. 위의 ④의 경우는 다른 경우보다 대체로 시기가 더 내려간 시점의 현상으로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된 마을은 대부분 민촌의 성격을 띤다.

나머지는 입향 이후에 이루어진 지역적 확산의 예가 된다.

입향 유형의 하나로 추가한다면 사회적으로는 열악한 위치에 있으나 경제적인 기반을 갖춘 자의 입향과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 향촌사회에서 외래사족으로 분류되는 세력들 중에는 사화(士禍)나 당쟁(黨爭)이 직접적인 입향동기가 된 경우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화를 당한 당사자들은 사후에 대부분이 복권되거나 재평가되었으므로 유형으로 따지면 첫번째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 지역의 사례들에서 나타난 입향의 시기와 배경을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역마다의 외래사족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입향시기를 보면 대략 조선 초, 즉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임란을 포함시키면 17세기 초까지) 약 2세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입향 배경으로서 사화 등의 정치적 사건이 있는 경우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입향처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처가나 외가가 가장 중요한 연고지가 되고 있다. 이것은 당대나 그 전대의 처가상속분이 그 경제적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들 입향의 대부분은 통혼(通婚)이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입향 이후의 과정, 즉 장기간 대를 이어 독자적인 세거지를 마련하기까지는 주로 개간을 통한 경제적 기반의 확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보를 쌓고 제언을 건설하여 언전(偃田)을 소유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겪어야 할 기존 지역세력과의 갈등이나 노동력 동원 문제 등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조선 초 이후 농지와 주거지가 평야로, 그리고 저지대로 확산되어간 추세를 감안하면 이러한 추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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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