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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신학교는 1885년(고종 22) 10월 28일자로 개교하였다. 마라발 신부는 부임하여 이 작은 신학교를 개교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성심신학교’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식 사목은 마라발 교장 신부뿐이었으며, 다른 평신도가 한문을 담당하였다. 학생으로는 피낭(Pinang)에서 귀국한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전 안드레아, 최태종(루가) 등 모두 7명이었다. 2년이 채 안 지나 1887년 3월에 신학교는 서울 용산(원효로4가 1번지)으로 이전하고, 신자들도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점차 교우촌의 흔적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학교는 교명에서 보이듯이, 이념과 형태가 현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이 된다. 교과과정은 신학과 철학을 위시하여 라틴어, 한문, 역사, 지리, 천문 등을 교육하였다. 가톨릭대학은 1855년(철종 6) 배론의 ‘성요셉신학당’을 최초의 모태로 삼으며, 성요셉신학당의 재건이 바로 예수성심신학교이다.
한편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부엉골 공소는 신학교의 본당 격으로 승격되었고, 교세도 점차 확대되어갔다. 그러나 신학교 이전과 동시에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1889년에 르 비엘(申三德) 신부가 부임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마르탱(沈良) 신부, 부이용(任加彌) 신부 등이 부엉골 본당을 담당하였는데, 부이용 신부가 1896년 9월 17일에 본당을 충청북도 감곡(甘谷)으로 이전하면서 다시 공소로 전락하였고, 1900년대 초 폐쇄되었다.
한국 천주교사의 첫 신학교는 1855년에 충북 제천의 배론에 있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 병인박해로 폐쇄되었는데, 신앙의 자유가 점차 묵인되면서 1882년에는 다시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의 페낭에 소재한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모두 21명의 유학생은 기후조건 등 여러 학습환경이 맞지 않자 국내에도 신학교를 세워 교육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초창기 부엉골은 강원도 원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여주로 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주는 강원도, 경기도, 충청북도를 아우르는 천주교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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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