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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암리가마터 출토 백자 해무리굽완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자기가 일상용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유학에 생활이념을 둔 사대부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은 가장 한국적이라는 분청자와 조선도자를 상징하는 백자를 만들어 내었다. 분청자는 조선시대의 매우 특색 있는 도자기로서 고려 말기의 상감청자에서 변화되어 세종 때에는 기법이 더욱 다양해지고 세조 때에는 성숙기를 맞이하였다가 16세기 전반에는 이미 백자에 흡수, 소멸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생산이 거의 끝났을 것으로 보인다. 대략 200여 년 간 생산된 우리나라 도자기 가운데 가장 순박하고 민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5세기 전반 『태종실록』에 따르면 호조에서 관·어용 자기를 토산공물로 수납하였고, 15세기 후반에는 전국 도자기의 공물로 충당하기 어려워지면서 국가에서 사기장을 법제적으로 소속시키고, 한성과 가까운 광주지역에 국가에서 직접 사기를 생산하는 사기제조장으로 분원을 설치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16세기 초 한성의 훈련원에 사옹원 주관 아래 왕가용 자기를 제조하였으나 연료와 원료의 결핍 때문에 북한산성, 관악산으로 옮겼다가 송파를 건너 광주군의 돌마면, 실촌면, 퇴촌면을 거쳐 약 280년 전에 분원으로 이전하였다. 이때부터 서서히 자가소에서 토산공물은 줄어가고 광주 일대에 국가에서 직접 제작하는 사옹원 소속 관영 사기제조장인 분원을 설치하여 관·어용 도자기를 제작 사용하였다. 전국에 있던 도자소 경영에 큰 변화를 가져와 점차 민간소용 도자기를 제작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1)
여주지역은 조선이 건국하면서 도읍을 서울에 정하여 도자기의 수요가 한강수계를 중심으로 공급하는 조건이 발생하여 도자기 공급이 서울, 광주, 나아가 여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의 여주지역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민수용이었다.
여주 도자문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도호부가 있는 여주관청의 북쪽에 있는 관산(串山) 마을에서 중품에 해당하는 도기를 생산하였다. 또 1481년(성종 12)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자기와 도기를 여주의 특산물로 꼽았다. 1910년대에 『조선산업지』에는 3개의 도요지로 금사면 궁리, 북면 오금동, 강천면 가야동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2)
여주지역에서는 질 좋은 고령토 자원을 바탕으로 고려 말부터 이미 청자, 백자 생산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여주시 현암동 싸리산에 다량으로 매장된 점토, 백토, 고령토 등 고급 도자기 원료를 광주분원에 제공하는 한편 분원의 도자기 제조기술을 원용하여 민수용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1990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사한 여주지역 가마터 지표조사에 따르면 중암리 고려백자요지를 비롯하여 운촌리 12기, 중암리 5기, 상교리 5기, 석우리 1기, 도전리 5기, 번도리 1기 등 28기를 확인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보고에 의하면 여주의 가마는 대개 북내면과 강천면에 집중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백자가마는 시기를 달리하면서 광주 중앙관요의 영향을 부단히 받아들여 기형, 번조방법 등에서 광주가마의 특징을 갖고 있는 한편 상교리의 가마터에서 보듯 광주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지역적인 특징도 보인다고 평가하였다.3)
19세기 후반은 근대사회로 들어가는 격동의 전환기였다. 조선시대 정치경제의 혼란은 수많은 농민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일본, 서구열강의 침투로 인한 조선사회의 격심한 변화는 급기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지국가로 전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주 분원의 도자생산은 쇠퇴하였으며 도공들은 분원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 가운데 가까운 곳이 인근의 여주였다. 여주 오금리로 와서 가마터를 잡고 분원백자를 만들었다. 1892년 이희풍(李熙豊)이 오금리에 와서 환요식 등요 1기를 축조하여 사기제조를 시작한 지 반년이 되어 폐업하고 이어 1897년 같은 모양, 같은 등요 1기를 같은 곳에 축조하였다. 또 다른 이는 김현채(金顯采, 1867~1942)로 자가 수긍(洙兢), 호가 해암(海庵)이다. 그는 분원에서 여주 오금리(현재 여주시 오금동)로 자리를 옮겨 조선조 분원사기의 전통을 이은 마지막 인물이다.
이렇게 여주지역은 광주 분원이 폐쇄되고 도공들이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그 일부가 정착한 것을 계기로 여주 도자문화가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여주에서 도자기는 주요한 생산품목이 된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여주지역으로 이주한 도공들이 질 높은 도자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한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 식기류가 들어오면서 도자산업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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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