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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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史』 열전 이색(李穡) 기사 1
- 내용:이 때(신창) 전제(田制)가 크게 무너진지라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가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과 더불어 사전(私田)을 개혁코자 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전제(田制)를 의론케 하니 이색(李穡)이 말하기를 구법(舊法)을 가볍게 고침이 불가(不可)하다 하여 그 논의를 보류하고 청종(聽從)하지 아니하였다. 이색(李穡)이 우왕(禑王)을 황려부(黃驪府)에서 알현(謁見)하고 곧 얼마 안 되어 해직(解職)을 빌고 이림(李琳)을 천거(薦擧)하여 자기를 대신케 하였더니 창왕(昌王)이 이색(李穡)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삼았다.
- 출전:『高麗史』 권115, 이색 전.
- 『高麗史』 열전 이색(李穡) 기사 2
- 내용:이색(李穡)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자 이숭인(李崇仁), 김사안(金士安) 등과 더불어 서로 신우(辛禑)를 여흥(驪興)에서 만나기를 기약하였는데 이색(李穡)이 기약에 앞서 홀로 만났으니 그 홀로 만났을 때 말한 바가 공약(公約)이었던가 사약(私約)이었던가 이는 가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 대간(臺諫)이 다시 이색(李穡)의 죄를 청하거늘 왕이 오사충(吳思忠)과 전시(田時) 및 집의(執義) 이고(李皐)를 보내어 이색(李穡)을 장단(長湍)에서 국문(鞠問)케 할 새 명하여 말하기를,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경동(驚動)치 말게 할 것이며 만약 불복(不服)하거든 마땅히 다시 그 뜻을 품고(告)하라.” 이색(李穡)이 과연 불복(不服)하기를, “신창(辛昌) 세우기를 주장한 것은 내가 아는 바 아니외다. 내가 만약 망언(妄言)한다면 상천(上天)이 감림(監臨)할 것이오니 청컨대 조민수(曹敏修)와 대변(對辯)케 하시옵소서.” 라고 하거늘 오사충(吳思忠)이 전시(田時)를 보내어 이로써 아뢰니 왕이 명하여 고문(拷問)을 가하라 하였다. 전시(田時)가 돌아와 선지(宣旨)를 선고(宣告)하고 옥졸(獄卒)로 하여금 곤장(棍杖)을 잡고 좌우(左右)에 서서 하루 종일 밤새도록 핍박하고 또 조민수(曹敏修)의 창녕옥(昌寧獄) 공사(供辭)를 제시하니 이색(李穡)이 말하기를, “회군(回軍)하여 왕 세우기를 의론할 즈음에 조민수(曹敏修)가 나 이색(李穡)에게 묻기를 종친(宗親)과 아들 신창(辛昌) 중에서 누가 적당한가 하더이다. 이때 조민수(曹敏修)는 주장(主將)으로써 군사를 거느려 돌아왔고 또 신창(辛昌)의 외조(外祖) 이림(李琳)과는 족친(族親)이 되어 마음을 같이 하였으므로 이색(李穡)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또 신우(辛禑)가 선지 이미 오래이므로 아들 신창(辛昌)을 세움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며, 벽두(劈頭)에 천립(擅立)의 말을 권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경사(京師)에 입조(入朝)하여 예부(禮部)에 이르렀더니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아비를 쫓아내고 자식을 세웠다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理)가 있으며 왕과 최영(崔瑩)이 모두 잡혀 갇혔다 하니 이것을 어찌 의(義)라 하리오’ 라고 하거늘 내가 이에 응답하기를, ‘최영(崔瑩)이 왕을 교사(敎唆)하여 요양(遼陽) 범(犯)하기를 꾀하매 장군 조민수(曹敏修)가 이(李)【태조(太祖)의 구휘(舊諱)】와 더불어 옳지 못하다 생각하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과감히 출발하지 아니하니 최영(崔瑩)이 자주 독촉하는지라 부득이 회군(回軍)하여 최영(崔瑩)을 옥(獄)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왕이 노하여 여러 장군을 살해코자 하였기 때문에 태후(太后)가 왕을 폐하여 강화(江華)에 안치(安置)하니 개경(開京)과 20여 리(里) 거리(距離)며 구도(舊都) 명승(名勝)의 땅이라 성정(性情)을 이양(怡養)함에 이와 같은 땅이 없고 또 재상 시위(宰相侍衛) 의장(儀仗) 기물(器物)이며 아침저녁으로 선봉(膳奉)함이 모두 지난날과 같이 하였으니 무슨 축방(逐放)이 있으리오’ 하였고, 경사(京師)에서 돌아옴에 미쳐 시중(侍中) 이(李)【태조(太祖)의 구휘(舊諱)】에게 이르기를, ‘이원명(李原明)의 말은 귀로는 가히 들을지언정 입으로는 가히 말하지 못하겠도다. 여흥(驪興)은 원지(遠地)니 맞아 근지(近地)에 안치(安置)하면 임금을 내쳤다는 이름을 면(免)할 수 있으리라.’ 하여 다만 이 말을 했을 뿐이며, 진실로 영립(迎立)의 의론은 없었습니다.” 라고 하니 오사충(吳思忠) 등이 초사(招辭)를 받아 가지고 이에 돌아왔다. …… (공양왕) 3년에 헌부(憲府)가 다시 이색(李穡)과 이종학(李種學)의 치죄(治罪)를 청하였으나 청종(聽從)치 아니하니 헌부(憲府)가 다시 이색(李穡)의 죄를 논하거늘 왕이 마지못해 이를 청종(聽從)하여 함창(咸昌)에 유배하였다. 간관(諫官)이 또 이종학(李種學)을 논죄하여 원지(遠地)에 유배하였다가 이윽고 서울 밖에 편의를 따르도록 허락하니 이색(李穡)이 글을 올려 사례하기를, “신이 재주가 없음에도 다행히 전하께서 들어가 정통(正統) 계승함을 만나 초정(初政)한 즉시부터 외람되이 판문하사(判門下事)를 받고 차면 넘친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더욱 근신(謹愼)을 더해오더니 10일이 지나지 못하여 문득 탄핵을 입어 소장(章)이 연(連)하고 간독(簡牘)이 쌓여 극형에 처하기를 청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더욱 준열(峻烈)하여 약세(弱勢)를 보이지 아니하매 신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있나이다. 진실로 전하(殿下)의 호생(好生)의 덕이 하늘과 같이하지 아니하였던들 공신(功臣)이 어찌 오늘에 이르름을 얻어서 성상(聖上) 작해(作解)의 은택(恩澤)을 입을 수 있었겠나이까? 신이 사명(赦命)을 듣던 날 사은(謝恩)하기에 급하여 곧 폄소(貶所, 폄류(貶流)된 곳 )를 떠나 재를 넘어 북(北)으로 향할 때 풍설(風雪)을 만나 충주(忠州)와 여주(驪州) 사이에서 숙질(宿疾)이 발동하여 발섭(跋涉)하기 어려워 엄류(淹留, 오래 두류(逗留) 하는 일 )하기에 이르러 바로 궐정(闕庭)에 나아갈 수 없었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쇠비(衰憊)함을 불쌍히 여기사 길이 호생(好生)의 덕을 보이옵소서.” 라고 하였거늘 왕이 글을 보고 곧 역전(驛傳)에 명하여 이색(李穡) 및 이숭인(李崇仁), 이종학(李種學)을 불렀다. …… (공양왕) 4년에 군신(群臣)을 수창궁(壽昌宮)에서 향연할 때 이색(李穡)이 취해서 소리를 내어 크게 웃거늘 가까이 시위하던 대호군(大護軍) 김정경(金鼎卿)이 이를 그치게 하니 이색(李穡)이 황공(惶恐)하여 황급히 나갔다. 정몽주(鄭夢周), 유만수(柳曼殊) 등이 취하면 문득 훤호(喧呼)하더니 이날에는 조금 잠잠하였으니 대개 이념(李恬)이 술로 인하여 죄를 얻어 징계(懲戒)되었기 때문이다. 정몽주(鄭夢周)를 베어 죽이고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을 국문(鞠問)하니 공사(供辭)가 이색(李穡), 이종학(李種學), 이종선(李種善)에 관련되거늘 이종학(李種學), 이종선(李種善)을 외방(外方)에 유배하였다. 왕의 사자(使者)가 이색(李穡)에게 이르기를, “경(卿)의 두 아들이 조정(朝廷)에 죄를 얻었으니 경(卿)도 갈지어다. 양강(兩江)의 밖은 오직 경(卿)의 갈 곳이니라.”고 하니 이색(李穡)이 무연(憮然)히 말하기를, “신은 돌아 보건대 전택(田宅)이 없으니 과연 어디로 돌아가리까?” 하거늘 드디어 금천(衿川)에 폄류(貶流)하였다가 이어 여흥(驪興)에 옮겼다. 본조(本朝, 조선 왕조)에 들어와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였고 죽으니 나이 69세이다.
- 원문: 穡之回自京師也, 與李崇仁·金士安等, 相期, 謁禑於驪興, 而穡先期獨見, 其獨見之際所言, 公歟私歟, 是未可知也, …… 臺諫復請穡罪, 王遣思忠·時及執義李皐, 鞫穡于長湍, 命之曰, 毋令穡驚動, 若不服, 當更□旨, 穡果不服曰, 倡立辛昌, 非穡所知, 穡若妄言, 上天監臨, 請與敏修對辨, 思忠遣時以聞, 王命加拷訊, 時還宣旨, 使獄卒, 執杖立左右, 竟日通夜逼之, 且示敏修昌寧獄辭, 穡曰, 回軍議立之際, 敏修問穡, 宗親與子昌孰當, 時敏修以主將領兵還, 且與昌外祖李琳, 爲族同心, 穡不敢違, 以禑立已久, 當立子昌, 爲對無首勸擅立之語, 去年, 朝京師, 到禮部, 尙書李原明曰, 汝國逐父立子, 天下安有是理, 王與崔瑩, 皆被拘囚, 是何義耶, 予應之曰, 崔瑩敎王, 謀犯遼陽, 將軍曹敏修與李【太祖舊諱】 以爲不可, 到義州, 不敢發瑩數趣之, 不獲已, 回兵繫瑩獄, 於是, 王怒, 欲害諸將, 故太后廢王, 置于江華, 去開京二十餘里, 舊都勝地, 怡養性情, 無如此地, 且宰相侍衛, 儀仗器物, 朝夕膳奉,皆如平昔, 何放之有, 及還, 謂侍中李【太祖舊諱】 曰, 原明之言, 耳可得聞, 口不可道, 驪興遠地, 迎置近地, 可免放君之名, 但此語而已, 固無迎立之議, 思忠等, 取辭乃還, …… 三年, 憲府請復治穡·種學, 不從, 憲府復論穡罪, 王勉從之, 流于咸昌, 諫官又論種學, 流遠地, 俄許京外從便, 穡上書謝曰, 臣以不才, 幸遇殿下入繼正統, □於初政, □受判門下事, 滿溢是懼, 愈增兢洙, 未浹旬日, 遽被彈劾, 連章累牘, 請置極刑, 閱歲三改, 益峻不衰, 臣之性命, 在於朝夕, 苟非殿下好生之德與天同, 功臣豈能得至今日, 以沐聖上作解之澤哉, 臣聞命之日, 急於謝恩, 葉離貶所, 踰嶺而北, 蒙犯風雪, 忠驪之閒, 宿疾發動, 難於跋涉, 致此淹留, 未得逕造闕庭, 伏望憐臣衰憊, 永示好生之德, 王覽書, □命驛召穡及崇仁·種學, ……四年, 宴群臣于壽昌宮, 穡醉, 發聲大笑, 侍近大護軍金鼎卿, 止之, 穡惶恐趨出, 鄭夢周·柳曼殊等, 醉輒喧呼, 是日稍沼, 盖懲於李恬使酒得罪也, 誅夢周, 鞫諫官金震陽等, 辭連穡·種學·種善, 流種學·種善于外, 王使謂穡曰, 卿之二子, 得罪於朝, 卿其去矣, 兩江之外, 惟卿所適, 穡憮然曰, 臣顧無田宅, 果安歸乎, 遂貶衿川, 尋徙驪興, 入本朝, 封韓山伯, 卒, 年六十九.
- 출전:『高麗史』 권115, 이색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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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