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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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史』 열전 정몽주(鄭夢周) 기사
- 내용: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獄)이 일어나매 대간(臺諫)이 그 무리의 논죄하기를 매우 힘쓰므로 정몽주(鄭夢周)가 4대를 추봉(追封)함을 인하여 대사(大赦)하기를 청하였다. …… 이에 성헌(省憲)과 형조가 다섯 가지 죄를 논하여 열거하기를, “…… 신우(辛禑)를 맞아 왕씨(王氏)를 영구히 끊을 것을 모의한 자는 변안열(邊安烈), 이을진(李乙珍), 이경도(李庚道), 원상(元庠), 이귀생(李貴生), 정지(鄭地), 우현보(禹玄寶), 우홍수(禹洪壽), 왕안덕(王安德), 우인열(禹仁烈) 및 이색(李穡), 정희계(鄭熙啓)입니다. …… 우인열(禹仁烈)은 위관(委官)으로서 순군(巡軍)에 앉아 김저(金佇)의 공사(供辭)를 명백하게 받지 않았고 왕안덕(王安德)은 도둔곶(都屯串)에서 패군(敗軍)한 후에 여러 날 길이 되는 여흥(驪興)에 가서 신우(辛禑)를 만나 보았는데 그 간의 사정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 왕이 명하여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은 그 집을 몰수하고 지용기(池湧奇), 박가흥(朴可興)은 그 전대로 부처(付處)하게 하고 우인열(禹仁烈), 왕안덕(王安德), 박위(朴韋)는 외방에서 편리한대로 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서울이나 외방에서 편리한대로 따르게 하였다. 처음에 왕안덕(王安德)도 또한 서울이나 외방에서 편리한 대로 따르게 하고 있었는데 김주(金湊)가 말하기를, “왕안덕(王安德)은 남포(藍浦)의 역(役)에서 모든 군사가 복몰(覆沒)하고 돌아올 때에 반드시 여흥(驪興)에 다니며 신우(辛禑)를 만나 보고 영립(迎立)할 것을 의론하였을 것이니 죄상이 명백치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외방에서 편리한대로 따르게 함은 그 사(賜)함이 또한 크다고 하겠습니다.” 하거늘 왕이 이를 듣고 따랐다.
- 원문:……而仁烈則以委官坐巡軍, 不明取佇之供辭, 安德則都屯串敗軍後, 往見禑於驪興, 累日之程, 其閒難測 …….
- 출전:『高麗史』 권117, 정몽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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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