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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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0년(성종 1):이조에서 영릉의 제향(祭享)을 여주(驪州) 관아에 맡길 것을 청함
- 내용 :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영릉(英陵)을 옮겨 모신 뒤의 제향(祭享)은 제릉 (齊陵)의 예(例)에 의하여 여주(驪州)의 관아로 하여금 맡아서 베풀도록 하였으므로, 봉상시(奉常寺)의 관리는 실상 소임(所任)이 없으니, 금후로는 보내지 말아서 역로(驛路) 및 지대(支待)하는 폐단을 제거하게 하고, 또 여주(驪州)·이천(利川)의 교수(敎授)는 모두 문신(文臣)으로써 제수하였으므로, 그들로 바꾸어 대축(大祝)을 삼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成宗實錄』 권8, 성종 1년 12월 19일 임술.
- 1471년(성종 2):김국광의 처벌을 간하는 대사간 김수녕 등의 상소문
- 내용 :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김수녕(金壽寧)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 또 대관(臺官)에게 탄핵을 당하였으나, 성상께서 세조(世祖)의 중신(重臣)이라 하여 특별히 명하여 논죄하지 말게 하시니, 죄는 더욱 무거운데 더욱 면죄(免罪)하여 준다면 김국광의 마음은 더욱 더 스스로 방자(放恣)하여질 것입니다.
바야흐로 사위 이한이 도망 중에 있을 때 성상께 말씀드리기를, ‘이한이 처음에 여주(驪州)의 내수사(內需司) 종 집에 간 후에 곧 그 간 곳을 알지 못 합니다’라고 하였다가, 이한이 또 사유(赦宥)를 만나서 곧 죄를 면하니, 또 성상께 말씀드리기를, ‘지금 상주(尙州)의 촌장(村庄)에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인이 사위를 위하여 숨긴다면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군부(君父)의 앞에서 말씀드리면서 이와 같이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김국광이 어찌 이한이 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가 처음에는 ‘간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지금 촌장(村庄)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가 촌장(村庄)에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한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 엎드려 바라건대, 예단(睿斷)으로 김국광을 유사(有司)에 회부하여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서 여망(輿望)에 부응(副應)하게 하소서.”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1, 성종 2년 7월 28일 기해.
- 내용 :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김수녕(金壽寧)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 또 대관(臺官)에게 탄핵을 당하였으나, 성상께서 세조(世祖)의 중신(重臣)이라 하여 특별히 명하여 논죄하지 말게 하시니, 죄는 더욱 무거운데 더욱 면죄(免罪)하여 준다면 김국광의 마음은 더욱 더 스스로 방자(放恣)하여질 것입니다.
- 1471년(성종 2):영릉 배알을 위해 여주로 출발함
- 내용 : 임금이 영릉(英陵)에 배알(拜謁)함으로 인하여 여주(驪州)에 거둥하니, 백관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나가서 대가(大駕)를 전송하였다. 광주(廣州)의 율현(栗峴) 냇가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는 같은 고을 낙생역(樂生驛) 앞들 파오달(波吾達)에서 머물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2, 성종 2년 10월 8일 병자.
- 1471년 (성종 2):대가(大駕)가 여주에 머무름
- 내용 : 대가가 출발하여 이천(利川)의 복하천(福河川) 가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는 여주(驪州) 강가 파오달(波吾達)에서 머물렀다. 도성(都城)에 머물러 있는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이조 판서 이극증(李克增)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2, 성종 2년 10월 10일 무인.
- 1472년(성종 3):여주의 여기(女妓)를 혁파하게 함
- 내용 :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여주(驪州)의 여기(女妓)를 혁파하라.” 하였다. 본주(本州)는 영릉(英陵)과의 거리가 겨우 5리(里)로서, 제관(祭官)이 왕래하며 혹 오설(汚褻)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혁파한 것이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5, 성종 3년 2월 8일 을해.
- 1472년(성종 3):의금부에 전지하여 여주(驪州) 등에 부처(付處)한 윤처신 등을 방면하게 함
- 내용 : 의금부에 전지하여, 부여(扶餘)에 영속(永屬)한 난신(亂臣) 이명민(李命敏)의 아우 이미민(李靡敏), 영동(永同)에 안치(安置)한 난신 박계남(朴季男)의 형 박맹우(朴孟愚), 광주(光州)에 안치한 난신 탁계연(卓繼然)의 조카 탁윤신(卓閏新), 여주(驪州)에 부처(付處)한 난신 윤처공(尹處恭)의 아우 윤처신(尹處信), 의성(義城)에 부처한 난신 박이녕(朴以寧)의 얼제 박춘길(朴春吉), 이천(利川)에 부처한 난신 김상충(金尙忠)의 형 김막동(金莫同), 여주(驪州)에 부처한 난신 고덕칭(高德稱)의 형 고덕수(高德守)를 외방 종편(外方從便)하게 하고, 신계(新溪)에 영속한 난신 조번(趙番)의 아우 조한(趙翰), 평택(平澤)에 영속한 난신 김연(金衍)의 아우 김말을지(金末乙知)·김오을미(金吾乙未)·김우지(金羽之), 사천(泗川)에 영속한 난신 대정(大丁)의 아우 소정(小丁), 고양(高陽)에 영속한 난신 하석(河石)의 형 하석견(河石堅), 해주(海州)에 영속한 난신 양옥(梁玉)의 아우 양진(梁進), 토산(兎山)에 영속한 난신 황귀존(黃貴存)의 아우 황양존(黃良存)·황계존(黃季存), 여주(驪州)에 영속한 난신 고덕칭(高德稱)의 아우 고덕부(高德符), 강화(江華)에 영속한 난신 황의헌(黃義軒)의 얼제(孼弟) 황녹송(黃綠松), 고양(高陽)에 영속한 난신 이식배(李植培)의 형 이종배(李種培)와 그 아우 이증배(李增培), 직산(稷山)에 영속한 난신 이식배(李植培)의 아우 이흥배(李興培), 덕산(德山)에 영속한 난신 중은(仲銀)의 아우 중석(仲碩), 옹진(瓮津)에 영속한 난신 조순생(趙順生)의 형 조효생(趙孝生), 광주(廣州)에 영속한 난신 조완규(趙完圭)의 아우 조완주(趙完珠), 현풍(玄風)에 영속한 난신 김중산(金仲山)의 아우 김추(金秋), 웅천(熊川)에 영속한 난신 탁계연(卓繼然)의 아우 탁숙연(卓淑然), 영산(靈山)에 영속한 난신 김중산(金仲山)의 아우 김석불(金石佛), 순천(順天)에 영속한 난신 이양보(李陽甫)의 아비 이천년(李千年), 평양(平壤)에 정속(定屬)한 김정광(金廷光)을 종원 안치(從願安置)하게 하였다. …….
- 출전 : 『成宗實錄』 권18, 성종 3년 5월 24일 경신.
- 1474년(성종 5):형조에 명하여 각 관청에 정역·충군되거나 지방에 유배된 자들을 방면하게 함
- 내용 : 형조(刑曹)에 전지(傳旨)하기를, “…… 형조(刑曹)의 조예(皁隸)로 정역(定役)한 한승중(韓承重)과, 여주(驪州)에 충군(充軍)한 홍금생(洪今生)과 월곶이[月串]에 충군한 이중산(李仲山)과, 정포(井浦)에 충군한 북간(北間)·백산(白山)·김경(金敬)과, 파주(坡州)에 도년(徒年)으로 정역(定役)한 이숙무(李叔武)·이차중(李次仲)과, 연천(漣川)에 도년으로 정역한 임지(任址)와, 파주에 충군한 최산(崔山)과, …… 온성(穩城)에 정역한 박춘생(朴春生)·한영실(韓永實)·강을기(姜乙己)·박덕금(朴德金)·신자평(申自平)·최전기(崔田己)·박원충(朴元忠)을 방면(放免)하게 하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41, 성종 5년 4월 17일 신미.
- 1474년(성종 5):이조에 전지하여 여주 사람 민계점을 효행으로 임용함
- 내용 :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여주(驪州) 사람 민계점(閔繼點)은 효행(孝行)이 있으니, 재주에 따라서 녹용(錄用)하여 권장하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卷45, 成宗 5년 7월 10일 癸亥.
- 1475년(성종 6):여주 사람 최담(崔淡)이 은 16냥을 바침
- 내용 : 여주(驪州) 사람 최담(崔淡)이 은(銀) 16냥(兩)을 얻어서 바치니, 무명[綿布] 30필을 주어 보상하라고 명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55, 성종 6년 5월 7일 을묘.
- 1476년(성종 7):충청·경기 여주 일대의 도둑에 대한 체포를 명함
- 내용 : 포도장(捕盜將) 이양생(李陽生)이 충주(忠州)로부터 와서 복명(復命)하기를, “충주(忠州)·음죽(陰竹)·죽산(竹山)의 경계인 수리산(愁里山)과 여주(驪州)의 강금산(剛金山) 등지는 도둑의 무리들이 둔취(屯聚)하는 것이 매우 많은데, 신 등이 형세가 약하고 또 갑주(甲胄)와 창[鋒]도 없어서 당해낼 수가 없으므로, 다만 10인만을 체포하여 충주와 여주의 두 고을[州]에다가 나누어 가두었습니다. 신 등이 저 곳에 있으면서 도둑이 민가(民家)를 불 지르고 들어가 활을 쏘아 몇 사람을 상하게 하였다는 것을 듣고, 원주(原州)와 지평(砥平)의 사이를 지나면서 보니,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신도 거의 도둑에게 찔리는 바가 되었으나 임득창(任得昌)에게 의지하여 겨우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이 도둑은 모두 권총(權聰)의 종[奴]입니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66, 성종 7년 4월 28일 신축.
- 1477(성종 8):여주목사 조지(趙祉)가 하직하니 인견함
- 내용 : 여주목사(驪州牧使) 조지(趙祉)가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옛날 노공(魯恭)이 교화를 행함에 황충(幌蟲)이 경내(境內)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대는 내 마음을 체득(體得)하여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76, 성종 8년 2월 20일 기축.
- 1477년(성종 8):김의동(金義童)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제수함
- 내용 : 유수(柳洙)를 숭정대부(崇政大夫) 문성군(文城君)으로, 한치례(韓致禮)를 정헌대부(正憲大夫) 서릉군(西陵君)으로, 김의동(金義童)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최전(崔湔)을 통정대부(通政大夫) 곽산군수(郭山郡守)로, 송중문(宋仲文)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철산군수(鐵山郡守)로, 김효손(金孝孫)을 통정대부(通政大夫) 희천군수(熙川郡守)로, 노효신(盧効愼)을 통정대부(通政大夫) 태천군수(泰川郡守)로, 홍백연(洪伯涓)을 절충(折衝) 경기 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로 삼았다.
- 출전 : 『成宗實錄』 권82, 성종 8년 7월 3일 무진.
- 1478년(성종 9):최숙정을 여주목사로 삼음
- 내용 : 김영견(金永堅)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로 삼고, 최숙정(崔淑精)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최숙정(崔淑精)은 옛사람의 시문(詩文)을 잘 표절하여, 일찍이 상서(上書)하여 일을 논(論)하는데 모두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칠월편론(七月篇論)을 전사(傳寫)하였고, 당시에 『원시체요(元詩體要)』가 아직 세상에 널리 전파되지 않았는데, 홍문관(弘文館)의 월과(月課)에서 최숙정이 전부 원시(元詩)의 표절(剽竊)을 범하여 수석(首席)을 차지하였다. 요우(僚友)가 최숙정에게 말하기를, ‘시를 지을 때에 옛사람의 시를 보는가?’ 하니, 최숙정이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동료가 『원시체요』를 가져다가 최숙정이 표절한 편(篇)을 가리키면서 웃으며 보이니, 최숙정이 다른 것을 말하면서 보지 아니하였다. 그의 아우 최숙경(崔淑卿)도 역시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행신(行身)하는 것이 그의 형과 비슷하였고, 막내아우는 일찍 요절(夭折)하여 남이 아는 이가 없었는데, 최숙정이 일찍이 『동문선(東文選)』의 편찬에 참여하였을 적에 작은 문집을 가지고 와서 서거정(徐居正)에게 아울러 뽑아 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죽은 아우의 유고(遺藁)입니다’ 하므로, 서거정이 보니, 모두 최숙정의 수단(手段)이었다. 전해 듣는 사람들이 이를 병 되게 여기었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90, 성종 9년 3월 5일 정묘.
- 내용 : 김영견(金永堅)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로 삼고, 최숙정(崔淑精)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1478년(성종 9):집의 김여석을 불러 여주에 가서 최숙정이 백성을 다스리는 잘잘못을 살피게 함
- 내용 :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김여석(金礪石)을 명소(命召)하여 전교하기를, “너는 여주(驪州)에 가서 최숙정(崔淑精)이 백성을 다스리는 잘잘못을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99, 성종 9년 12월 8일 을미.
- 1479년(성종 10):좌부승지 김계창이 사헌부에서 아뢰었던 여주목사 최숙정의 죄를 아뢰니 조율하게 함
- 내용 :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좌부승지(左副承旨) 김계창(金季昌)이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었던 여주 목사(驪州牧使) 최숙정(崔淑精)의 국안(鞫案)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물으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극균(李克均)이 대답하기를, “최숙정의 죄는 진실로 가긍(可矜)합니다.” 하였고, 집의(執義) 김여석(金礪石)이 아뢰기를,“신(臣)이 일찍이 명을 받고, 여주(驪州)에 가서 창고에 있는 곡(斛) 4개를 보았는데, 그 1은 14두(斗) 들이이고, 그 1은 15두 들이이며, 그 2개는 14두 5승(升) 들이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나누어줄 때에는 소곡(小斛)을 쓰고, 거둬들일 때에는 대곡(大斛)을 쓴 것이 확실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곡(斛)을 쓰는 것이 같지 않음은 그 실정을 능히 검찰하지 못한데 지나지 않으나, 이를 조율(照律)함이 옳겠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00, 성종 10년 1월 8일 을축.
- 1479년(성종 10):사헌부에서 여주목사 최숙정의 죄율을 아룀
- 내용 :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최숙정(崔淑精)이 크고 작은 곡(斛)을 사용한 죄는 율(律)이 장(杖) 1백 대에, 고신(告身)을 다 추탈(追奪)하는 데에 해당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를 용서하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00, 성종 10년, 1월 13일 경오.
- 1479년(성종 10):장령 안처량이 여주의 한윤옥이 살인을 조사할 것을 청함
- 내용 :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장령(掌令) 안처량(安處良)이 아뢰기를, “여주(驪州) 죄인 한윤옥(韓潤玉)이 한명회(韓明澮)의 사채(私債)를 거두다가 인하여서 살인(殺人)하였는데, 이것은 반드시 권세를 믿고서 그러한 것입니다. 청컨대 아울러 한명회를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조(刑曹)에서 지금 국문(鞫問)하고 있으니, 그 추국(推鞫)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마땅히 국문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한윤옥은 바로 윤반(尹磻)의 반당(伴倘)이니, 정승(政丞)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으며, 비록 이것이 정승의 반당이더라도 정승이 어찌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쳤겠는가?”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00, 성종 10년 1월 21일 무인.
- 1479년(성종 10):양곡 용기를 바꾼 여주목사 최숙정 등을 처벌함
- 내용 : 좌부승지(左副承旨) 김계창(金季昌)이 사헌부(司憲府)의 계본(啓本)을 가지고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최숙정(崔淑精)과 판관(判官) 김세호(金世豪)가 관아에서 크고 작은 곡(斛)을 쓴 죄는, 율(律)이 장(杖) 60대와 도(徒) 1년에 해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최숙정은 검거(檢擧)할 수 없으니, 파직(罷職)하는 것이 마땅하고, 김세호는 장(杖) 1백 대를 속(贖)바치게 하고, 고신(告身)을 모두 빼앗도록 하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02, 성종 10년 3월 1일 정사.
- 1479년(성종 10):시독관 김흔·우부승지 채수 등이 성종이 간언에 신중할 것을 건의
- 내용 :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김흔(金訢)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시어 간(諫)하는 말에 따르기를 물 흐르듯 하시어서 응방(鷹坊)을 없애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였으므로, 당우(唐虞)·삼대(三代)와 같이 융성할 것을 꼭 바랐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보니 점차 처음과 같지 않은 것이 자못 많습니다. …… 전날 허침(許琛)이 지평(持平)이 되었을 때 신정(申瀞)은 청렴하지 못하고 윤호(尹壕)는 감사(監司)에 마땅하지 못하다고 논박하였었는데, 얼마 안 되어 신정이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면서 허침은 정랑(正郞)이 되었고, 윤호가 감사가 되면서 허침은 여주판관(驪州判官)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우연한 일이라고는 해도 이를 보고 두려워서 위축된 자는 반드시 허침을 경계로 삼을 것입니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02, 성종 10년 3월 21일 정축.
- 1479년(성종 10):조지주(趙之周)를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제수함
- 내용 : 조지주(趙之周)를 통정 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09, 성종 10년 10월 3일 을유.
- 1479년(성종 10):대간이 여주목사의 임명에 부당함을 아룀
- 내용 : 구치곤이 또 아뢰기를, “당상관(堂上官)으로서 죄를 지어 파면된 사람을 연한(年限)에 구애하지 않고서 임금의 명령을 받아 서용(敍用)하는 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무릇 죄를 지어 산직(散職)에 둔 사람은 2년을 지낸 후에야 서용(敍用)하게 되니, 스스로 죄과(罪過)를 알고 난 후에 이를 임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상관(堂上官)이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곧 파면시켰다가 곧 임용시킨다면, 징계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다. 근일에 이소(李昭)가 여주목사(驪州牧使)로서 죄를 범하여 파면되었는데도 일찍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곧 관직을 임명하였으니, 매우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11, 성종 10년 11월 5일 병술.
- 1480년(성종 11):전 여주목사 최숙정이 『사월』·『아음회편』 등의 책을 바침
- 내용 : 전 여주목사(驪州牧使) 최숙정(崔淑精)이 『사월(史鉞)』과 『아음회편(雅音會編)』 등의 책을 바치니, 모마장(毛馬粧) 1부(部)를 하사(下賜)하였다【사신(史臣)은 논한다. “『아음회편(雅音會編)』 등의 책은 군주(君主)가 반드시 보지 않아도 될 것인데 최숙정이 이를 바쳤으니, 듣는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13, 성종 11년 1월 18일 기해.
- 1480년(성종 11):홍문관 부제학 최숙정에게 부의를 내림
- 내용 :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최숙정(崔淑精)이 졸(卒)하였다. ……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최숙정은 글재주[詞華]가 조금 있었으나, 재주 있는 사람을 투기(妬忌)하여 제배(儕輩)들에 끼지 못하는 바가 되었다. 일찍이 여주목사(驪州牧使)로서 파직(罷職)되어 뜻을 얻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홍문관에 다시 들어와서 매우 기뻐하였는데, 마침 술과 안주를 하사(下賜)하시어, 최숙정이 실컷 마시고 이것으로 인해 병을 얻어서 죽은 것이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21, 성종 11년 9월 2일 기묘.
- 1481년(성종 12):의금부에서 역적에 연좌된 사람을 안치·정속시킨 숫자를 기록하여 아룀
- 내용 :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역적에 연좌된 사람들을 그 족친이 보수(保授)하고 있는데, 이제 나이가 찬 자는 안치(安置)를 시키든지 혹은 여러 고을에 정속(定屬)시켜야 하므로, 그 숫자를 모두 기록하여 아룁니다. …… 난신 조순종(趙順宗)의 삼촌 조카 말손(末孫)은 여주(驪州)에 안치시키고, 난신 이계량(李季良)의 삼촌 조카 석을동(石乙同)은 교하(交河)에 안치시키고, 난신 신정보(辛井保)의 삼촌 조카 옥동(玉同)은 김해(金海)에 안치시키고, 난신 변자의(卞自義)의 첩의 딸 소사(召史)는 밀양(密陽)의 관비로 정속시키고, 난신 이중순(李仲淳)의 삼촌 조카 말치(末致)는 하동에 안치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25, 성종 12년 1월 16일 신묘.
- 1481년(성종 12):양주목사 시절 관둔전을 세가에 증여한 여주목사 조지주(趙之周)를 파직함
- 내용 : 여주 목사(驪州牧使) 조지주(趙之周)가 전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적에 관둔전(官屯田)을 사사로이 세가(勢家)에 증여(贈與)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발각이 되어 파직(罷職)되었다.
- 출전 : 『成宗實錄』 卷126, 成宗 12년 2월 22일 丙寅.
- 1482년(성종 13):전 여주판관 홍호가 진휼로 상소함
- 내용 : 전 여주판관(驪州判官) 홍호(洪浩)가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지난해 봄에 관직에서 떨어져 고향에 돌아가 있었기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가을부터 겨울까지 항상 시골[村野]에 있으면서 가난하고 외로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고 들었기에 말씀드립니다. 읍(邑)이라 하는 데서 전야(田野)의 늙은이들이 모두 이르기를, ‘내가 태어난 뒤에 비록 흉년을 여러 번 만났지마는 사방에서 굶주림을 알리는 것이 금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어떤 이는 가산(家産)을 다 팔아서 입과 배를 채워 굶어 죽는 것을 구제하려 하여도 넉넉지 못한 자가 있으며, 어떤 이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아내까지 떠나서 실가(室家)가 서로 보전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며, 어떤 이는 먹을 것이 끊어져 뼈만 남아서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며, 어떤 이는 유리걸식(流離乞食)하다가 구학(溝壑)에 굴러 죽는 자가 있습니다.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금년 봄으로부터 보리가 익기에 이르는 동안에 백성들이 마침내 유망(流亡)하여서 십실(十室)에 아홉 집은 비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유민도(流民圖)를 그려 올린 자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대저 사람의 정리(情理)는 하루라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하면 굶주리고 해가 마치도록 옷을 지어 입지 못하면 헐벗게 됩니다. 굶주리고 헐벗음이 몸에 간절하면 비록 군자(君子)라도 빈궁한 데서 마음을 굳게 가지는 것이 드문데, 하물며 소인(小人)들이겠습니까? 이제 빈궁한 백성들이 다투어 일어나서 도둑이 되어 마을 집들을 분탕(焚蕩)하며 양민(良民)을 괴롭히고 길에서 도둑질하여 죽이고 재물을 뺏는 것이 없을 날이 없습니다. 신은 그들의 형세가 날로 성(盛)하여서 장차 조정의 근심이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방금(方今)의 근심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풍속이 야박(野薄)하여져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陵蔑)하여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이 폐기(廢棄)되어 닦아지지 않아 아내가 남편을 업신여기고 종이 그의 주인을 죽이는 것이 가끔 있습니다. 더더구나 음란(淫亂)한 풍속이 날로 조장되고 고알(告訐)이 점점 성해집니다.
그런데도 대간(臺諫)이나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이응(李膺)과 같이 탁(濁)한 것을 거르고 맑은 것을 드날려서 퇴폐된 기강(紀綱)을 떨쳐 일으키는 것으로써 자기의 책무(責務)로 삼는 자가 누구입니까? 주석(柱石)같이 중한 대신(大臣)으로서 위상(魏相)과 같이 강개(慷慨)하여 말할 것은 다 말하여 세상의 도의를 부지(扶持)하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무로 삼는 자가 또한 누구입니까? 들으니, 옛날의 재상들은 소가 허덕거리는 것을 보고도 근심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윤상(倫常)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한(漢)나라의 가생(賈生)이 다시 오늘에 태어나서 지금의 사건들을 본다면 통곡(痛哭)과 유체(流涕)로서 끝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신이 엎드려 보건대 전하(殿下)께서 흉년을 구제하는 일은 이미 감사(監司)와 수재(守宰)들에게 위임하고, 또 진휼사를 파견하여 총관(總管)하게 하시니, 그 백성들을 근심함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수령들은 눈앞의 것만 해결하면서 구차스럽게 견책(譴責)이나 당하지 않으려는 자가 간혹 있습니다. 신이 원하는 것은 감사와 수령들이 임금의 덕의(德意)를 받들어서 부지런히 백성들의 고통을 구휼(救恤)하고 성심껏 슬퍼하여 친히 여염(閭閻)을 출입하면서 굶주린 백성을 많이 살리는 자는 차례를 따지지 않고 탁용(擢用)하시고, 겉치레만 하고 실지에 힘쓰지 않아서 성심으로 백성을 애휼(愛恤)함이 적고 당상(堂上)에 앉아서 큰소리나 치면서 빈궁한 마을을 직접 다니지 아니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려 죽게 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고 내쫓으며, 때때로 자주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감사와 수령들의 정성껏 하는가 허위(虛僞)로 하는가를 검찰하게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백성은 적자(赤子)이고 임금은 부모(父母)이며, 수령들은 유보(乳保)입니다. 적자가 굶주려 우는데도 유보가 구휼하여 주지 않으면 부모된 마음에 어찌 측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백성들을 친하는 직책(職責)은 수령만한 것이 없고 흉년을 구제하는 급무(急務)가 이때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데도 수령들의 게으르고 태만한 자가 편한 것만 생각하고 수고스러움을 꺼려서 아주 외딴 촌락과 거리에도 오히려 직접 가서 구휼하지 않는데 더구나 감사(監司)이겠습니까? 더구나 진휼사이겠습니까? 한갓 관민(官民)을 번거롭게 할 뿐이고 진휼 구제하는 실적(實績)은 없다 하겠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흉년을 구제하는 책임은 전전으로 감사와 수령들에게 위임하고 자주 그들이 성의껏 하는가 허위(虛僞)로 하는가를 조사하여 상과 벌을 내릴 것이며, 진휼사는 불러 돌아오게 하여서 관민의 폐단을 덜어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사람들이 각기 권장(勸奬)되고 징계(懲戒)되어서 한 고을의 굶주린 백성은 한 고을의 수령이 살려낼 것이고, 한 도의 흉년에 대한 정책은 한 도의 감사가 수행할 것이니, 다른 도에서도 이렇게 하고 다른 고을에서도 이렇게 하면 혜택이 거의 백성들에게 미쳐서 죽음에 이르렀던 자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풍속이 야박하여 강상(綱常)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대신과 대간들이 작고 번쇄(煩碎)한 데만 힘써서 일찍이 이렇게 큰 것에는 마음을 두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부유(묵푼)의 시(詩)로써 풍자(諷刺)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대저 천하(天下)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강상(綱常)에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이것을 버려두고 정치를 한다면 그야말로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하며, 아비가 아비 노릇을 못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하며, 지아비가 지아비 노릇을 못하고, 지어미가 지어미 노릇을 못하여, 간특(奸慝)한 것이 날로 일어나고 민이(民彛)가 어지러워지고 소멸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풍속이 야박해지고 강상이 허물어지는 것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지겠습니까? 신은 그윽이 마음 아파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사물을 대하시어 충직한 말을 받아 주시고 더욱 황정(荒政)을 잘 가다듬으시며, 강상을 돈독하게 하신다면 종묘사직의 복이요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임금이 백성들의 죽는 것을 앉아 보기만 하고 구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39, 성종 13년 3월 23일 신묘.
- 내용 : 전 여주판관(驪州判官) 홍호(洪浩)가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지난해 봄에 관직에서 떨어져 고향에 돌아가 있었기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가을부터 겨울까지 항상 시골[村野]에 있으면서 가난하고 외로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고 들었기에 말씀드립니다. 읍(邑)이라 하는 데서 전야(田野)의 늙은이들이 모두 이르기를, ‘내가 태어난 뒤에 비록 흉년을 여러 번 만났지마는 사방에서 굶주림을 알리는 것이 금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어떤 이는 가산(家産)을 다 팔아서 입과 배를 채워 굶어 죽는 것을 구제하려 하여도 넉넉지 못한 자가 있으며, 어떤 이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아내까지 떠나서 실가(室家)가 서로 보전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며, 어떤 이는 먹을 것이 끊어져 뼈만 남아서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며, 어떤 이는 유리걸식(流離乞食)하다가 구학(溝壑)에 굴러 죽는 자가 있습니다.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금년 봄으로부터 보리가 익기에 이르는 동안에 백성들이 마침내 유망(流亡)하여서 십실(十室)에 아홉 집은 비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유민도(流民圖)를 그려 올린 자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대저 사람의 정리(情理)는 하루라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하면 굶주리고 해가 마치도록 옷을 지어 입지 못하면 헐벗게 됩니다. 굶주리고 헐벗음이 몸에 간절하면 비록 군자(君子)라도 빈궁한 데서 마음을 굳게 가지는 것이 드문데, 하물며 소인(小人)들이겠습니까? 이제 빈궁한 백성들이 다투어 일어나서 도둑이 되어 마을 집들을 분탕(焚蕩)하며 양민(良民)을 괴롭히고 길에서 도둑질하여 죽이고 재물을 뺏는 것이 없을 날이 없습니다. 신은 그들의 형세가 날로 성(盛)하여서 장차 조정의 근심이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방금(方今)의 근심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풍속이 야박(野薄)하여져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陵蔑)하여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이 폐기(廢棄)되어 닦아지지 않아 아내가 남편을 업신여기고 종이 그의 주인을 죽이는 것이 가끔 있습니다. 더더구나 음란(淫亂)한 풍속이 날로 조장되고 고알(告訐)이 점점 성해집니다.
- 1482년(성종 13):여산군(驪山君) 민발(閔發)의 졸기
- 내용 : 여산군(驪山君) 민발(閔發)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며 예장(禮葬)하는 것을 전례(前例)와 같이 하였다. 민발의 자(字)는 분충(奮忠)이고, 여주인(驪州人)으로, 증 좌찬성(贈左贊成) 민수산(閔壽山)의 아들이다. 정통(正統) 정사년에 처음으로 내금위(內禁衛)에 소속(所屬)되었는데, 여러 번 천관(遷官)하여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고, 경태(景泰) 경오년에 세조(世祖)를 따라 북경(北京)에 갔었다. 계유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복시윤(司僕寺尹)에 임명되고, 을해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되었으며, 병자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고, 다시 가정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진하였다. 성화(成化) 병술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또 등준시(登俊試)에 급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資)되어 행 용양위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이 되었으며, 정해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있어,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토벌(討伐)하게 하였는데, 민발이 참여하여 무공(武功)이 있었으므로,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의 호(號)를 하사(下賜)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하여 여산군(驪山君)에 봉(封)하였다.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자, 그의 형(兄) 민서(閔敍)가 남이(南怡)와 더불어 모반하여 복주(伏誅)되었다. 민발도 마땅히 연좌(緣坐)되어야 하는데, 예종이 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민발을 충직(忠直)하다고 하셨으니, 형(兄)의 죄에 연좌(緣坐)시킬 수 없다.” 하고, 두어 달 동안 안치(安置)하였다가 곧 소환(召還)하여 복직(復職)시켰다. 기축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하여,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으니, 향년이 64세이다. 시호는 위양(威襄)이니, 사납고 굳세고 과감함을 위(威)라 하고, 일로 인하여 공이 있음을 양(襄)이라 한다. 민발은 우직(愚直)하고 글자를 알지 못하였으나, 여력(餘力)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 쏘는 재주가 대적할 자가 없었으며, 성질이 또한 진실(眞實)하여서 구차하게 남에게 따르지 않았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40, 성종 13년 4월 4일 임인.
- 1482년(성종 13):형조에서 강도질한 여주 수군 김분산·사노 연동 등의 사형을 청함
- 내용 :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여주(驪州)의 죄수인 수군(水軍) 김분산(金粉山)과 사노(私奴) 연동(延同)·관노(官奴) 내은동(內隱同)이 여러 곳에서 강도질한 죄와, 북청(北靑)의 죄수인 사노(私奴) 변보(邊甫)·춘산(春山)·거마(巨麻)가 횃불을 들고 인가(人家)를 강도한 죄는,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하고, 그 처자(妻子)들은 『대전속록(大典續錄)』에 의거하여 소재지(所在地)의 노비(奴婢)로 영속(永屬)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43, 성종 13년 7월 17일 갑신.
- 1483년(성종 14):이수치(李壽稚)를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제수함
- 내용 : 이병정(李秉正)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의주목사(行義州牧使)로, 이수치(李壽稚)를 통정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변극곤(邊克坤)을 통정대부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삼았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60, 성종 14년 11월 16일 을사.
- 1484년(성종 15):여주인(驪州人) 지중추부사 이계손(李繼孫)의 졸기
- 내용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계손(李繼孫)이 졸(卒)했는데,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기를 예(例)대로 하였다. 이계손의 자(字)는 인지(引之)이며, 여주(驪州) 사람이다. 정통(正統) 정묘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교감(校書館校勘)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전임(轉任)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겼다. 천순(天順) 정축년에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승진하고, 기묘년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승진했다. 경진년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겼었는데, 한명회(韓明澮)가 순찰사(巡察使)가 되어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추천하자 이계손이 어머니의 병을 들어 사직하니, 한명회가 아뢰어 웅천(熊川)으로 귀양 보냈었다. 조금 있다 소환(召還)하여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를 제배(除拜)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승진하였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전임했다. 임오년에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는데, 마침 흉년이 들자 이계손이 진휼(賑恤)을 잘하여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고, 들어와 예조(禮曹)·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이 되었다. 이때 평안도(平安道)에 유랑(流浪)하는 백성이 매우 많으므로 특별히 초무사(招撫使)로 보냈는데, 잘 안정시켰다 하여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시켰다. 성화(成化) 기축년에는 영안도(永安道)가 이시애(李施愛)의 난리 뒤부터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 때문에 이계손으로 관찰사를 삼아 진정시키도록 명했었다. 본도(本道) 사람들은 본래 학문(學問)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계손이 서적(書籍)을 청구하여 자제(子弟)들을 뽑고 사유(師儒)를 가리어 가르치게 하였으며, 네 계절에 도회(都會)를 베풀어 성취(成就)되기를 권면(勸勉)하고 장려하니, 이로부터 본도의 자제들이 과거에 뽑히는 자가 서로 잇달았다. 신묘년에는 갈리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제배(除拜)하였고, 조금 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승진하였으며, 갑오년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제배하고, 을미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다가, 회간왕(懷簡王)의 고명주청사(誥命奏請使)가 되어, 부사(副使) 김질(金礩)과 명(明)나라 서울에 갔었다. 병신년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고, 정유년에는 들어와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고, 무술년에는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전임되었다가 죄를 받아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었으며, 신축년에는 소환하여 지중추부사를 제배하였다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병조판서(兵曹判書)로 전임하였고, 계묘년에 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2세이다. 경헌(敬憲)이라고 시호(諡號)하니, 일찍 일어나서 일을 조심하여 하는 것을 경(敬)이라 하고, 널리 글을 배워 능력이 많은 것을 헌(憲)이라 한다. 이계손은 사람됨이 도량이 너그럽고 크며 재주와 식견이 통하고 민첩했다. 일을 만나면 부지런히 조심해서 하여 지나는 곳마다 업적이 있었으나, 다만 전장(田莊)을 많이 점유하므로 당시의 논평이 없지 않았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70, 성종 15년 9월 15일 기해.
- 1485년(성종 16):전 여주목사 이소를 갈도록 청함
- 내용 : 승지(承旨) 등이 아뢰기를, “회령(會寧)의 방어(防禦)는 가장 긴요하니, 모름지기 알맞는 사람을 가려서 보내소서. 부사(府使) 이소(李昭)는 일찍이 회양(淮陽)과 여주(驪州)를 맡았으나, 모두 다스린 효과가 없어 오래 되지 않아서 파면되었으며 또 무재(武才)도 모자라니, 청컨대 이를 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을 쓰는 데에는 한 가지만을 가지고 논(論)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다스려 나가는 데에, 저 일은 할 수 없으면서 혹 이 일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계종(金繼宗)은 비록 무재는 있었으나, 용맹만을 믿고 적(敵)을 가볍게 여겨서, 주장(主將)에게 품고(稟告)하지도 아니하고 마음대로 저들의 경계에 들어갔다가 거의 패배를 당하였다. 이소는 비록 무재는 모자란다 하더라도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함께 의논하여 의망(擬望)하였는데, 어찌 취할 바가 없겠느냐? 만일 바꾸어 보내게 되면, 이는 그의 전정(前程)을 폐(廢)하게 되는 것인데, 애매(曖昧)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86, 성종 16년 12월 16일 계사.
- 1486년(성종 17):이창신 등이 여주지역의 규찰 내용을 아룀
- 내용 :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이창신(李昌臣)·교리(校理) 조지서(趙之瑞)가 명을 받고 여주(驪州)·파주(坡州)에 가서 수령(守令)의 불법한 것을 규적(糾摘)하고 와서 아뢰었는데, 뽕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군기(軍器)가 잘 단련되지 못한 것 등의 일이었다. 승정원에 전교(傳敎)하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수치(李壽稚)·판관(判官) 오치인(吳致仁)·파주 목사(坡州牧使) 이윤(李)이 민간에 심은 뽕나무의 수가 관찰사 칠사계본(七事啓本)의 수와 같지 않고, 군기가 또한 잘 단련되지 못하였으니, 사헌부(司憲府)에 내려 추문(推問)하라. 또 수령의 허위를 감사가 마땅히 규핵(糾覈)하여야 할 것인데, 칠사계본에 거짓으로 그 본수를 증가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감사도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87, 성종 17년 1월 20일 정묘.
- 1486년(성종 17):제언순찰사 이극증(李克增)을 여주(驪州)에서 소환함
- 내용 : 제언순찰사(堤堰巡察使) 이극증(李克增)이 경기(京畿) 여주(驪州)에 이르자 눈이 많이 쌓여서 순심(巡審)하지 못하고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니, 곧 소환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97, 성종 17년 11월 24일 을축.
- 1486년(성종 17):형조에서 결당하여 강탈한 김막동 등을 참부대시에 처할 것 등을 아룀
- 내용 :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여주(驪州) 죄수 양인(良人) 김막동(金莫同)이 분산(粉山)·연동(延同)과 더불어 결당(結黨)하여 길에서 원산(元山)·오좌미(吾佐未)를 겁박(劫迫)하여 마필(馬匹)과 잡물을 강탈한 죄와, 광주(光州) 죄수 내섬시 종[內贍寺奴] 강미치(姜未致)와 양인 양석지(梁石知)·이산수(李山守) 등이 물고(物故)된 손자정(孫自丁)·박흔손(朴欣孫) 등과 더불어 결당하여 김만산(金萬山)·양약생(梁若生)·정언(鄭彦)·정길(鄭吉)의 집에 불을 지르고 강도질한 죄는 모두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하고, 처자(妻子)는 『대전(大典)』에 의하여 영구히 있는 곳의 관노비(官奴婢)로 붙여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98, 성종 17년 12월 20일 신묘.
- 1486년(성종 17):김적(金磧)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제수함
- 내용 : 신승선(愼承善)을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박성손(朴星孫)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김자정(金自貞)을 가선대부 대사헌(大司憲)으로, 박건(朴楗)·박안성(朴安性)·김세적(金世勣)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김극유(金克)를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로, 김적(金磧)을 통정대부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설순조(薛順祖)를 통정대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조지주(趙之周)를 통정대부 강화부사(江華府使)로, 홍임(洪任)을 통정대부 청송부사(靑松府使)로, 김숭한(金崇漢)을 통정대부 갑산부사(甲山府使)로, 김휘(金徽)를 통정대부 귀성부사(龜城府使)로 삼았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98, 성종 17년 12월 27일 무술.
- 1487년(성종 18):여주목사(驪州牧使) 김적이 사조(辭朝)함
- 내용 :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적(金磧)이 사조(辭朝)하였다. (김적이) 인하여 아뢰기를, “신의 어미가 금년 나이 80인데 양주(楊州) 땅에 살고 있습니다. 청컨대 왕래하면서 서로 만나보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199, 성종 18년 1월 17일 무오.
- 1488년(성종 19):조지서(趙之瑞)가 왜인의 호송관으로 가면서 여주 등의 불법한 일을 아룀
- 내용 : 형조정랑(刑曹正郞) 조지서(趙之瑞)가 왜인(倭人)의 호송관(護送官)으로 경상도(慶尙道)로 가면서 밀지(密旨)를 받들고 광주(廣州)·여주(驪州)·제천(堤川)·청풍(淸風)·문경(聞慶)·상주(尙州)·밀양(密陽)·창녕(昌寧) 관리의 불법(不法)한 일들을 적발하여 아뢰었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19, 성종 19년 8월 1일 임진.
- 1488년(성종 19):천령현의 복귀를 청함
- 내용 :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권경희가 아뢰기를, “천령(川寧) 백성들은 박성근(朴成根)의 대악(大惡)을 범(犯)한 일을 듣고 서로가 이르기를,‘본현(本縣)에서는 일찍이 죄를 범한 일이 없고, 다만 여주(驪州)로 천릉(遷陵)한 뒤에 토지(土地)가 협소(狹小)하므로 혁파하여 붙이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천령(川寧)을 세우고 음죽현(陰竹縣)을 혁파하여 여주(驪州)에 붙이는 일로 퇴장(退狀)을 받아 상언(上言)코자 합니다. 또 평안도(平安道) 태천군(泰川郡) 맹인(盲人)이 그 자식에게 죽임을 당한 일로 국가에서 명호(名號)를 깎아 현(縣)으로 만들었거든, 하물며 박성근은 친지가 하는 일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친히 스스로 범역(犯逆)하였으니, 실로 천지(天地)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니, 마땅히 음죽(陰竹)을 혁파하여 대악(大惡)을 징계하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일국(一國)의 법(法)을 두 가지로 써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으매, 이극배(李克培)가 대답하기를, “신은 듣건대, 몸이 대악(大惡)을 범한 자는 그 집을 허물고 집터를 웅덩이로 만든다고는 하였으나, 고을을 혁파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숙기(李淑琦)는 말하기를, “지난날에 충주(忠州)에도 이와 같은 자가 있었건만, 다만 그 사람을 죄주었을 뿐으로, 그 고을은 혁파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일은 매우 많습니다.” 하고, 김승경(金升卿)은 말하기를, “박성근을 추국(推鞫)한 일은 신이 실로 그 시종(始終)을 알고 있습니다. 그 대악(大惡)이 됨은 입으로 형용할 수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한갓 고을을 혁파하는 것만 아니라, 그 고을의 벼슬아치도 마땅히 죄주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니, 추론(追論)함은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가령 평양(平壤) 같은 거부(巨府)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장차 이를 혁파하겠는가? 그 혁파할 수 없음은 자명(自明)한 것이다” 하였다. 이숙기(李淑琦)가 말하기를, “전조(前朝) 때에, 묘청(妙淸) 등이 평양(平壤)에 웅거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혁파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21, 성종 19년 10월 28일 무오.
- 1489년(성종 20):여주사람 이의명의 사형을 감함
- 내용 :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여주(驪州) 사람 이의명(李義明)이 하늘의 명이라 핑계하고 망령되게 요사한 글과 요사한 말을 만들어 아뢴 죄는 율문(律文)에 의하면 참대시(斬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이의명이 공초(供招)한 말을 살펴보건대, 미친병이 든 망령된 사람이니, 따질 것도 못됩니다. 그 죄가 가볍지 않으니, 형조(刑曹)를 시켜 상세히 복심(覆審)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이의명의 일은 그 공초한 말을 보면 참으로 망령된 사람이며, 또 그 말이 정리(情理)를 몹시 해치는 일이 아니므로, 중한 법으로 처치하는 것은 미안한 듯하니, 사형을 감(減)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그 상서(上書)한 말을 보면 미친병이 든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요망하게 백성을 현혹하는 무리이니, 우선 아뢴 바에 따라 상세히 복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율문에 의하면 참형(斬刑)에 처하여야 마땅하나, 성상께서 결단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다만 말한 바는 망령된 생각으로 어지러이 말한 것이므로 심병(心病)으로 발광한 사람이니, 여는 사람의 예로 논할 수는 없겠습니다.” 하니, 사형을 감(減)하라고 명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30, 성종 20년 7월 13일 기사.
- 1489년(성종 20):함흥 사람 주맹수 등이 驪興府의 경우처럼 함흥군의 이름을 승격시킬 것을 청함
- 내용 : 이조(吏曹)에서 함흥인(咸興人) 주맹수(朱孟粹) 등의 상언(上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함흥군(咸興郡)이 비록 목조(穆祖) 이하의 네 능(陵)이 있는 곳이고, 영흥부(永興府) 또한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 탄생(誕生)하신 곳이나, 준원전(濬源殿)이 있는 곳은 다시 강등(降等)할 수 없으므로, 영흥(永興)에 다시 함흥(咸興)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흥부(驪興府)와 양주부(楊州府)는 영릉(英陵)과 광릉(光陵)이 있는 곳이므로 부를 승격하여 목(牧)으로 삼았고, …… 능침(陵寢)이 있는 곳과 본원(本源)의 땅은 으레 모두 이름을 승격하였습니다. 함흥이 비록 이시애(李施愛)의 역당(逆黨)인 이중화(李仲和) 등이 살던 곳이기는 하나, 이름을 강등하여 군(郡)으로 삼은 지가 지금 이미 20년이 되었으니, 네 능침(陵寢)이 있는 용비(龍飛)의 어향(御鄕)을 작은 고을[小邑]에 비기는 것은 실로 미안(未安)합니다. 청컨대 예(例)에 의하여 이름을 승격하소서.” 하니,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32, 성종 20년 9월 16일 신미.
- 1490년(성종 21):신부(申溥)를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제수함
- 내용 : …… 신부(申溥)를 통정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유승손(柳承孫)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평안도우후(行平安道虞侯)로 삼았다. 사헌부는 사수(死囚) 김세흥(金世興)이 도망하여 추국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체임시킨 것이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37, 성종 21년 2월 5일 정해.
- 1490년(성종 21):여주 사람 사노(私奴) 개질동(介叱同)이 그 주인 이윤형(李允泂)을 위협한 일에 대해 사형을 감하도록 명함
- 내용 : 여주(驪州) 사람 사노(私奴) 개질동(介叱同)이 손으로 그 주인 이윤형(李允泂)의 옷소매를 잡고 칼을 뽑아 위협[恐]한 일을 이윤형(李允泂)의 문서로 고한 것으로 인하여 10여 차례 고신(拷訊)하였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일이 송견(宋見)과 지인후(池仁厚)에게 관계되어 네 차례 고신하였으나, 역시 자복하지 않으므로 형조(刑曹)에서 의옥(疑獄)으로 취품(取稟)하니,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1, 성종 21년 6월 18일 기해.
- 1490년(성종 21):형조에서 여주 죄수 윤승로 등의 죄가 참부대시임을 아룀
- 내용 : 정사를 보았다.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해주(海州) 죄수 사노(寺奴) 막동(莫同)이 이동(李同)을 죽이고 소를 빼앗은 죄와 여주(驪州) 죄수 학생(學生) 윤승로(尹升老)가 그 아들 김만이(金萬伊)의 처(妻) 눌근(訥斤)을 간음한 죄는 아울러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3, 성종 21년 8월 18일 무술.
- 1490년(성종 21):여주 행차 길에 용인의 파오달에서 유숙함
- 내용 : 임금이 장차 여주(驪州)에 거둥하려고 묘시(卯時)에 어가(御駕)를 움직이자, 백관(百官)들이 흥인문(興仁門) 밖까지 공경히 전송하였다. 이날 용인(龍仁) 파오달(波吾達)에서 유숙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5, 성종 21년 9월 12일 신묘.
- 1490년(성종 21):여주에서 큰 비를 만나자 그치기를 기다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기로 함
- 내용 : 어가(御駕)가 여주(驪州)의 대교천(大橋川)에 이르니, 큰 비와 함께 뇌성과 번개가 치더니 한참 뒤에 멈추었다. 여주 파오달(波吾達)에 이르러서 전교하기를, “제사를 행할 때 임하여 뇌성과 비가 너무 심하니, 만약 며칠을 두고 개이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승에게 물어 보라.” 하니, 홍응(洪應) 등이 아뢰기를, “가을비가 어찌 며칠 계속 오겠습니까? 시간의 조만(早晩)을 헤아리지 말고 그 개일 때를 기다리면 제사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일 개이지 아니하면 옷이 젖고 용모를 잃어 친제(親祭)를 지내지 못할 것이니, 이 사유(事由)를 관원을 보내어 고하고, 2, 3일 머물면서 날이 개이기를 기다려 친히 제사하고 돌아가겠다. 그리고 강무(講武)는 정지함이 어떠한가?” 하니, 홍응(洪應)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윤당합니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5, 성종 21년 9월 14일 계사.
- 1490년(성종 21):여주 파오달에서 유숙함
- 내용 : 이날 여주(驪州) 파오달(波吾達)에서 유숙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5, 성종 21년 9월 14일 계사.
- 1490년(성종 21):여주 유생을 시험하여 황순중(黃順中) 등을 생원으로 삼음
- 내용 : 여주(驪州) 유생(儒生)을 시험하여 황순중(黃順中) 등 3인을 뽑아서 생원(生員)으로 삼고는, 임금이 융복(戎服)을 입고 객관(客館) 문에 나아가 방방(放榜)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5, 성종 21년 9월 15일 갑오.
- 1490년(성종 21):어가가 머문 땅의 백성들은 전조를 감해주고 여주 등의 향교에는 쌀을 내리도록 함
- 내용 :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영릉(英陵)을 배알하고 여러 고을을 순수(巡狩)해 살피니, 경기의 백성이 모두 그 폐단을 받았다. 그러나 어가가 머문 땅에는 노고와 소비가 더욱 많았으니, 사리로 보아 마땅히 넉넉하게 돌보아야 할 것이다. 여주(驪州)·이천(利川)·양지(陽智)·용인(龍仁)·광주(廣州)의 인민들에게는 금년의 전조(田租)를 절반으로 감할 것이며, 여주·이천 향교에 각각 쌀 30석을, 용인 향교에는 20석을 내려 주어서 유생들의 학과를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5, 성종 21년 9월 15일 갑오.
- 1490년(성종 21):여주 파오달(波吾達)에서 유숙함
- 내용 : 이날 여주(驪州) 파오달(波吾達)에서 유숙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5, 성종 21년 9월 15일 갑오.
- 1490년(성종 21):이천부(利川府)에서 관찰사 송영 등에게 하사품을 내림
- 내용 : 어가가 이천부(利川府)에 이르자, 관찰사(觀察使) 송영(宋瑛)에게 대흥필단(大紅匹段)으로 된 옷 1령(領)을 하사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내가 오로지 능침을 배알하기 위하여 왔었는데, 지금 이미 제사를 행하였고, 요사이 그르친 일도 없어서 내가 매우 기쁘다.” 하고, 또 여주 목사(驪州牧使) 신부(申溥)에게 자적 면주(紫的綿紬)로 된 겹철릭[裌帖裏] 1령을 하사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내가 여러 날 머무르면서 폐단 되는 일을 보지 못하였고, 또 들으니, 네가 바로 신정승(申政丞)의 아들이라 하므로 특별히 하사하니, 너는 모름지기 백성 다스리는 데 마음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5, 성종 21년 9월 16일 을미.
- 1490년(성종 21):영돈녕 이상 등을 불러 민영견 등의 직임에 관하여 의논함
- 내용 :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정부(政府)·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를 명소(命召)하여 민영견(閔永肩)의 참판(參判)과 이시보(李時珤)의 판결사(判決事) 직임(職任)이 적당한지의 여부를 의논하게 하였다. …… 손순효(孫舜孝)·성준(成俊)은 의논하기를, “민영견(閔永肩)·이시보(李時珤)가 비록 문과(文科)·무과(武科) 출신은 아니지만, 일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습니다. 민영견은 일찍이 양양부사(襄陽府使)·양주목사(楊州牧使)·인천부사(仁川府使)·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고, 이시보는 일찍이 음죽현감(陰竹縣監)·강화부사(江華府使)·연안부사(延安府使)·진주목사(晉州牧使)·여주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잘못한 바가 없었으며 다스리는 성과가 있었으니, 참판(參判)과 판결사(判決事)의 직임에 무슨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하고, …… 이철견(李鐵堅)은 의논하기를, “신이 지난 신축년에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있을 때 이시보(李時珤)가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는데, 마침 그 해에 흉년[凶荒]이 드니,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부지런하였으며, 결송(決訟)하는 수(數)도 다른 사람보다 특이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음죽(陰竹)·강화(江華)·연안(延安)·여주(驪州) 등의 고을 수령(守令)이 되었을 때에도 시행하는 데 잘못이 없어서 백성들의 원성[怨咨]이 없었으니, 판결사(判決事)의 직임에 무방(無妨)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46, 성종 21년 10월 10일 무오.
- 1491년(성종 22):여주의 사례를 들어 기병과 보병에게 지급할 말에 관한 어서를 내림
- 내용 :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1. 기병(騎兵)은 말 두 필(匹)에 보인 1명. 1. 보병(步兵) 두 사람에 말 한 필을 주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지난번 여주(驪州)에서 강무(講武)할 때에 군사들이 모두 보인(保人) 두 사람을 거느렸었다. 그러나 가끔 짐을 실은 말이 넘어지는데 그 두 사람으로는 도와서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인이 병이 들면 호수(戶首)가 혼자 말을 먹이며 보인을 구제할 수 없고, 호수가 병이 들면 보인도 혼자서 말 두 마리를 먹이면서 호수를 구제 할 수 없으니, 이것도 큰일이다. 비록 양식이 든다 하더라도 두 사람을 거느리도록 맡기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보병(步兵) 두 사람에 아울러 말이 한 필이라면 네 사람이 말 한 마리를 가지는 것이니, 서로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올적합(兀狄哈)이 서로 어울려 처음 싸울 때에 틀림없이 진(陣)에 갑자기 뛰어들어 위협할 것이니, 경(卿)이 아뢴 바에 의거하여 도끼[斧]·낫[鎌]·창(槍)·칼[釰]·몽둥이[杖]를 많이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마전(磨箭)은 자체가 가벼워 쏘아도 명중시킬 수 없으니 호전(虎箭) 모양으로 별도로 만들어 저들이 진으로 갑자기 뛰어들 때에 맞이하여 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52, 성종 22년 4월 19일 갑자.
- 1491년(성종 22):개성유수 유순·경기감사 김제신 등에게 북정 일정을 통지함
- 내용 :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유순(柳洵)과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김제신(金悌臣)과 강원도관찰사 김여석(金礪石)과 충청도관찰사 홍흥(洪興)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숙기(曹淑沂)와 전라도관찰사 김극검(金克儉)과 병마절도사 신주(辛鑄)와 경상도관찰사 정숭조(鄭崇祖)와 좌도병마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 하숙부(河叔溥)와 우도병마절도사(右道兵馬節度使) 조극치(曹克治)와 영안남도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 변종인(卞宗仁)과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 성준(成俊)에게 하서(下書)하기를, “…… 지금 병부(兵符)를 보내니, 합해 조사하여 경기(京畿)의 남양(南陽)·수원(水原)·양성(陽城)·진위(振威)·용인(龍仁)·안산(安山)·음죽(陰竹)·여주(驪州)·이천(利川)·지평(砥平)·양근(楊根)·가평(加平)·영평(永平)·포천(抱川)·양주(楊州)·광주(廣州)·과천(果川)·금천(衿川)·죽산(竹山)·양지(陽智)·마전(麻田)·연천(漣川)·인천(仁川) 등의 고을의 군사는 9월 초 2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4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개성부(開城府)의 군사는 9월 초 3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4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 영안도(永安道) 군사의 길을 떠날 일시(日時)는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절도(節度)를 듣도록 하라. 아아! 군사가 이미 나가는데 명분(名分)이 있고 군대가 마땅히 정직하매 웅장(雄壯)하게 된다. 죄인(罪人)을 잡아 신문하고 오랑캐를 잡는 것이 목적이니, 내 한사람이 어찌 이오로(伊吾盧)에 분심(憤心)을 풀려고 하겠는가? 말을 쉬게 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변방 백성을 북방 들에서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55, 성종 22년 7월 4일 무인.
- 1492년(성종 23):윤간(尹侃)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음
- 내용 : 조위(曹偉)를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로, 신수근(愼守勤)을 통정대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김심(金諶)을 통정 대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박원종(朴元宗)을 통정대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윤간(尹侃)을 통정대부 여주목사(驪州牧使)로, 홍임(洪任)을 통정대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삼았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68, 성종 23년 8월 7일 을사.
- 1493년(성종 24):남조(南祚)의 관직 제수에 관해 의논함
- 내용 :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황계옥(黃啓沃)이 와서 아뢰기를, “남조(南祚)는 처음에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서 주부(主簿)에 이르렀는데, 금년 정월(正月)에 감찰(監察)에 임명된 지 아직 7, 8삭(朔)에 지나지 아니하여 또 승진하여 여주판관(驪州判官)이 되었습니다. 대저 육조(六曹)·의정부(議政府)의 낭청(郞廳) 외에는 근로(勤勞)하거나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자가 아니면 승진시켜 옮길 수 없으니, 남조는 법에 승진시켜 서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개정하고 아울러 이조(吏曹)의 관리를 국문하소서.”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80, 성종 24년 7월 26일 무오.
- 1493년(성종 24):이판 홍귀달이 남조를 여주판관에 임명한 것에 대해 아룀
- 내용 : 이조판서(吏曹判書) 홍귀달(洪貴達) 등이 와서 아뢰기를, “…… 또 남조(南祚)를 여주판관(驪州判官)으로 삼으셨는데, 대간이 그가 갑자기 옮긴 것을 논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감찰(監察)로서 승진하여 5품이 된 자로 남조보다 빠른 이가 있었으며, 더구나 남조는 내력이 많고 관할하는 곳에서는 직무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의망(擬望)한 것입니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80, 성종 24년 7월 27일 기미.
- 1494년(성종 25):임광재가 여주에서 첩을 불러 본다고 한 말을 알아내어 낭청을 여주·진천에 보내어 잡아오게 함
- 내용 :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부경력(府經歷) 김석견(金錫堅)이 전(前) 부장(部將) 이사준(李師準)을 보았더니, 이사준이 이르기를, ‘풍천(豐川)이 나더러 이르기를, 「내 첩(妾)이 진천(鎭川)에 있는데 여주(驪州)와 접경(接境)한 까닭으로 내가 때때로 여주농사(驪州農舍)에 가서 첩(妾)을 불러 본다」고 하였다’ 하니, 청컨대 낭청(郞廳) 2원(員)을 여주(驪州)·진천(鎭川)에 나누어 보내어 잡아다 국문(鞫問)하고, 또 임광재(任光載)를 금부(禁府)에 불러다 신문(訊問)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가(可)하다. 그러나 임광재(任光載)를 금부(禁府)에서 신문(訊問)함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다. 이사준(李師準)이 아뢰기를, “풍천위(豐川尉)는 신(臣)의 집안이고, 어렸을 때에 일찍이 신에게 수업(受業)하였습니다. 지난달에 신의 집에 이르러 신(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내일 여주(驪州)로 돌아가는데, 그대도 나를 전송(餞送)하지 않겠는가?’ 하기에, 신(臣)이 인하여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신(臣)이 묻기를, ‘한창 심한 더위를 당하여 공(公)은 무엇 때문에 가는가?’고 하니, 이르기를, ‘여주(驪州)로부터 진천(鎭川)에 갔다가 돌아오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무엇 때문에 진천에 가는가?’고 하니, 말하기를, ‘진천(鎭川)에 농장(農莊)이 있고 첩(妾)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첩(妾)이라고 이르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고 하니,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고 하여, 신이 다시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의 문답(問答)은 여기에 그쳤을 뿐입니다.”하고, 도승지(都承旨) 김응기(金應箕)가 아뢰기를, “이제 이미 낭청(郞廳)을 여주(驪州)·진천(鎭川)에 나누어 보내었으니, 만약 임광재를 불러다 신문하면 반드시 사실 그대로 고(告)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가(可)하다. 하지만 전자에 오부(五部)로 하여금 그 양첩(良妾)을 고(告)하게 하였는데, 그 고한 자는 모두 양첩이 아니었다. 지금 만약 경도(京都)의 호구(戶口)를 다 궁구[盡括]하여 모녀(某女)가 모부(某婦)가 되었음을 알면 거의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91, 성종 25년 6월 21일 무인.
- 1494년(성종 25):임광재가 양첩을 취한 일이 없음을 아룀
- 내용 : 임광재(任光載)가 아뢰기를, “신(臣)이 엎드려 상교(上敎)를 들으니, 만 번 죽어도 후회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臣)의 비회(鄙懷)를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위법(違法)한 일은 비록 신의 소위(所爲)가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이 장형(杖刑)을 두려워해서 무복(誣服)한 것입니다. 신은 더위를 앓은 지 여러 해이며, 올 여름에도 여주(驪州)로부터 돌아와서 늘 누운 채로 죽물[粥水]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가변(家變)을 들은 이래로는 더욱 한 잔(盞)의 물도 마실 수가 없어 궐하(闕下)에 대죄(待罪)하려고 하였으나 촌보(寸步)도 스스로 걸을 수가 없었으며, 국가(國家)에서 또 변정(辨正)하는 까닭으로 이제까지 대죄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신이 죽을 땅에 이르지 못하고 추창하여 변정해서 아뢰지 못하였으니, 신은 만번 죽어도 회한(悔恨)은 없습니다. 양첩(良妾)의 일은 신의 소위(所爲)가 아닙니다. 만일 소위가 있어서 뒷날에 나타나면 신의 죄는 죽음도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신의 집 아이가 조작(造作)한 말에 연유한 것이며, 또한 신의 불초(不肖)함에 연유함이니, 죄는 마땅히 감수(甘受)하겠습니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91, 성종 25년 6월 21일 무인.
- 1494년(성종 25):사헌부에 임광재의 양첩이 있는 곳을 추고하여 알아낼 것을 명함
- 내용 : 사헌부(司憲府)에 전지(傳旨)하기를, “듣건대 풍천위(豐川尉) 임광재(任光載)는 진천(鎭川)의 양가(良家) 딸을 첩(妾)으로 삼고, 여주 농사(驪州農舍)로 내려갈 때에는 불러다 본다고 한다. 이른바 양첩(良妾)이란 자는 누구의 딸이며, 어느 때에 첩을 삼았으며, 어느 곳에 두었는가? 노비(奴婢)가 공주(公主)를 모살(謀殺)하고 일이 발각되어 갇히었으며, 온 집안이 큰 변고를 당하였는데, 임광재(任光載)는 가장(家長)으로서 염연(恬然)히 부끄러워하지 않고 허물을 이끌어 대죄(待罪)하지 않으니, 지극히 무례(無禮)하다. 또 재삼(再三)하문(下問)하였을 때에도 굳게 은휘하고 말하지 않았으니, 조금도 신자(臣子)의 뜻이 없다. 궁추(窮推)하여 아뢰라.”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91, 성종 25년 6월 22일 기묘.
- 1494년(성종 25):임광재의 형률을 논하여 직첩을 거두어 외방에 부처하게 함
- 내용 : 위관(委官) 윤필상(尹弼商) 등이 다시 빈청(賓廳)에 모이니, 전교하기를, “임광재(任光載)의 초사(招辭) 안에 혼인을 도모한 연원(年月)이 말비(末非)의 초사(招辭) 안에 혼인을 도모한 연월(年月)이 말비(末非)의 초사(招辭)와 같지 아니하고, 또 거기에 말하기를, ‘전년(前年) 겨울은 바로 조모(祖母)를 영장(永葬)하였을 때이니, 어느 겨를에 혼인을 도모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상중(喪中)에 혼인을 도모했음을 미워해서 이 말을 한 것이다. 만약 다시 힐문(詰問)하게 되면 어찌 직언(直言)하지 않겠는가? 위관(委官) 등은 다시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광재(任光載)가 대답하기를, “전년(前年) 7월은 조모(祖母)의 사후(死後)라서 신(臣)이 여주(驪州)에 가서 9월에 이르러서야 영장(永葬)하고서 돌아왔으니, 어느 겨를에 대이(大伊)와 더불어 복첩(卜妾)할 것을 같이 의논하였겠습니까? 존금(存今)을 통간(通奸)함은 실재로 올 봄이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년에 임광재(任光載)가 조모(祖母)의 상(喪)으로 과연 100일의 휴가를 청하여 여주(驪州)에 왕래하였으니, 비록 혹 왕래하였더라도 어찌 혼인을 도모할 수 없었겠는가?” 하였다. 위관(委官)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전지(傳旨)를 받들고 반복(反覆)하여 힐문(詰問)하였어도 오히려 즉시 승복(承服)하지 않았습니다. 신 등은 그윽이 헤아리건대 임광재의 마음에는 비상(砒礵)의 사건이 양첩(良妾)에게서 일어났으니, 만약 작첩(作妾)한 일을 승복하면, 큰일에 이를까 두려워하여 이 때문에 굳이 은휘하는 것입니다. 이 초사는 경중(輕重)에 관계되지 않으며 대개는 이미 복초하였으니, 청컨대 이로써 논단(論斷)하소서. 또 친문(親問)하실 때에 거역하고 승복하지 않은 죄도 또한 크니, 청컨대 아울러 조율(照律)하여 저죄(抵罪)하소서.” 하니, 드디어 명하여 조율(照律)하게 하였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92, 성종 25년 7월 16일 임인.
- 성종대왕묘지문[誌文] 중의 여주 관련 기사
- 내용 : 그 지문(誌文)은 이러하였다. “경술년에 여주(驪州)에 거동하여 영릉(英陵)에 참배하고 고을 백성에게 이해 조세(租稅)의 반(半)을 감해 주게 하시고, 지나가는 곳 고을에 관원(官員)을 보내어 선성묘(先聖廟)에 제사하게 하셨으며 학생에게 쌀을 차등이 있게 내려 주셨다.”
- 출전 : 『成宗實錄』 권297, 성종대왕묘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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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