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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23년(인조 1):장유(張維)·이식(李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내용 : 장유(張維)·이식(李植)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 이식은 사람됨이 겉으로는 청소(淸疏)한듯하면서도 일의 요체를 파악하는 안목이 상당히 있었다. 명민함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문장도 정묘하였다. 광해 때에 임숙영(任叔英)·정백창(鄭百昌)과 함께 여주(驪州), 광주(廣州)의 강변에 은거해 살면서 시와 술로 서로 교우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1, 인조 1년 4월 21일 경진.
  • 1624년(인조 2):경상감사 신경유에게 하유하여 남은 적들의 남진을 막게 함
    • 내용 :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듣건대, 남은 적이 마전포(麻田浦)를 건너 이천(利川)으로 향하였다 하니, 여주(驪州) 등지에 빨리 사람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4, 인조 2년 2월 12일 병신.
  • 1624년(인조 2):정석필의 장인 임석겸을 여주에서 효시함
    • 내용 : 정석필(丁碩弼)의 장인 임석겸(林碩謙)을 여주(驪州)에서 효시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4, 인조 2년 2월 30일 갑인.
  • 1627년(인조 5):여주 선비 정적·전 주부 조국렴이 쌀을 바쳤으므로 관직을 제수함
    • 내용 : 여주(驪州)의 선비 정적(鄭迪)은 벼 2백 석을 바치고 전 주부(主簿) 조국렴(趙國廉)은 벼 100석을 바쳐 군량을 보조하니, 하명하여 정적에게는 6품 실직을, 조국렴에게는 4품 실직을 제수하게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15, 인조 5년 2월 7일 갑진.
  • 1627년(인조 5):여주 등의 지역에 비바람이 불어 곡식이 모두 쓰러졌고 인천 등지에는 해일이 겹침
    • 내용 : 경기의 인천(仁川)·부평(富平)·안산(安山)·광주(廣州)·파주(坡州)·여주(驪州)·양근(楊根)·가평(加平)·삭녕(朔寧)·고양(高陽)·영평(永平)·진위(振威)·마전(麻田)·연천(漣川)·교하(交河)·과천(果川) 등지에 사나운 바람과 심한 비가 밤낮으로 번갈아 일어나서 곡식이 모두 쓰러졌고 인천·부평·안산 등 세 고을에 해일의 변까지 겹쳤다.
    • 출전 : 『仁祖實錄』 권16, 인조 5년 7월 14일 무인.
  • 1627년(인조 5):총융사 이서가 여주의 도망군 지금, 장단의 도망군 김승복 등을 효시할 것을 청함
    • 내용 : 총융사(總戎使) 이서(李曙)가 치계하기를, “경기의 도망쳤던 장수와 사졸을 죄다 주벌할 수 없으므로 그 중 범죄가 중한 자는 당사자를 충군시키고 가벼운 자는 도삼년(徒三年)에 처할 것으로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여주(驪州)의 초군(哨軍) 지금(池金)은 본래 패악하여 동생을 죽인 자로서 갑자년 변란 때 진중에서 도망했는데 이번에도 또 감히 도망하였으며 체포될 때에는 칼로 관원을 죽이려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장단의 초군 김승복(金承福)·우준(禹俊) 등은 신계(新溪)의 진영에서 재차 도망하여 산중에 막을 치고 도적질로 생활해 왔습니다. …… 지금·김승복·우준 등을 모두 효시하여 군정을 엄숙히 하소서.” 하였는데, 병조가 회계하기를, “여주의 도망군 지금과 장단의 도망군 김승복·우준 등의 죄상이 더욱 심악하니 선전관을 보내어 율에 따라 처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 사람 중에 김승복은 전일 이서가 보낸 성책(成冊) 중에 그의 성명이 없었던 것으로 앞뒤의 보고가 서로 어긋나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이서로 하여금 다시 조사해 아뢰게 한 뒤에 처치하소서.”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16, 인조 5년 7월 17일 신사.
  • 1627년(인조 5):김류가 역모를 진압할 군대를 조발할 방법을 건의함
    • 내용 :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이일원은 여주(驪州)·이천(利川)·양근(楊根)·지평(砥平)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유림은 양주(楊州)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게 하며, 이경용(李景容)은 광주(廣州)와 죽산(竹山)에 소속된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지키게 하고, 수원 방어사 이시백(李時白)은 본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와 호위하도록 해야 합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 출전 : 『仁祖實錄』 권17, 인조 5년 10월 1일 갑오.
  • 1627년(인조 5):이인거 역모와 관련된 죄인을 공초하고 처벌함
    • 내용 : ……출신 고찬(高纘)은 공초하기를, “가을에 자백(自白)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장차 의병 대장이 되면 너는 따르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나는 따르겠다’ 하였습니다. 자백이 말하기를 ‘횡성에서 70여 명의 군사를 얻을 수 있고, 여주(驪州)에 부자인 일가가 있어 군량을 마련할 수 있다. 계속해서 삼남(三南)으로 가서 군병을 불러 모으는 한편 상소하여 오랑캐를 토멸하기를 청하고, 또 강화하기를 주장한 사람 참수할 것을 청한 다음 서쪽으로 들어가 오랑캐의 사신을 참살할 것이다. 의병이라 명칭하면 향하는 곳마다 막을 자가 없을 것이요,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즉시 참수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17, 인조 5년 10월 5일 무술.
  • 1629년(인조 7):여주(驪州)의 정경의와 수호군 길수익의 효행에 대해 감사가 치계함
    • 내용 : 여주(驪州)에 사는 유학(幼學) 정경의(鄭景義)가, 자기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어 소생시켰고, 또 막내아우가 팔에 종기가 났는데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으며, 수호군(守護軍) 길수익(吉守益)은 자기 아버지를 따라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배가 침몰되어 자신은 탈출을 하였으나 자기 아비가 나오지 못한 것을 알고는 물로 다시 뛰어 들어가 아비를 안고 나오다가 미처 언덕에 오르기도 전에 힘이 빠져 죽고 말았는데, 그 이웃 사람들이 가엾은 생각에 그물을 던져 건져냈더니 부자가 서로 껴안고 있어서 풀리지를 않았다고 본도 감사가 계문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20, 인조 7년 4월 22일 정미.
  • 1630년(인조 8):원주목사 심명세가 선왕의 능묘를 여주로 옮길 것을 상소함
    • 내용 : 원주목사(原州牧使)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기를, “…… 신이 삼가 영릉(英陵)의 장지를 상고해 보건대 처음에는 광주(廣州)의 대모산(大母山) 아래에 있다가 그 뒤에 여주(驪州)로 옮겼는데, 그 당시 개장(改葬)에 대한 의논들이 필시 국승(國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옮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해오는 소문에 의하면, 처음 영릉에 장례를 지낸 뒤로 문묘(文廟)의 재위가 짧았고 노산(魯山)이 양위(讓位)하였으며 6명의 대군(大君)들이 잇따라 일찍 죽는가 하면 덕종(德宗)이 또 오래 살지 못하였으므로 당시에 모두들 대모산의 능이 불길하다고 탓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개장하는 논의를 결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종(睿宗) 원년에 여주(驪州)로 옮겼는데, 여주(驪州)는 풍수학 상으로 국가의 능묘 중 첫 번째로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이것이 어찌 조종의 깊고 먼 계획이 아니겠으며 나라의 운세가 영원히 힘입을 복록이 아니겠습니까? ……”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22, 인조 8년 2월 4일 갑인.
  • 1631년(인조 9):경기도 여주 등지에 계란만한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도 여주(驪州)·안성(安城)·죽산(竹山) 등 고을에 얼음과 우박이 교대로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25, 인조 9년 10월 18일 무오.
  • 1632년(인조 10):국릉이 있는 고을의 승격에 대해 예조와 이조가 논란함
    • 내용 : 이조가 아뢰기를, “국릉이 있는 곳은 당연히 승격시켜야 하겠으나, 고양(高陽)과 풍덕(豊德)은 본래 모두 군수(郡守)가 있던 곳으로 국릉이 있기 때문에 승격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주(驪州)는 영릉(英陵) 때문에 승격시켰으나, 이는 본주 목사를 헌관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과 상의하소서.”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26, 인조 10년 5월 3일 경자.
  • 1634년(인조 12):전 의정부 영의정 완평부원군 이원익의 졸기
    • 내용 : 전 의정부 영의정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졸하였다. 원익은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이 청고(淸苦)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치적(治績)이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고, 관서(關西)에 두 번 부임했었는데 서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선조조(宣祖朝)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임해(臨海), 영창(永昌)의 옥사(獄事)에 모두 간여되지 않았다.
    • 출전 : 『仁祖實錄』 권29, 인조 12년 1월 29일 병진.
  • 1634년(인조 12):최명길이 경기의 도둑을 잡는 방법에 대해 아룀
    • 내용 : 상이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을 불러 보니, 명길이 아뢰기를, “전에 도적이 횡행하기 때문에 기전(畿甸)에 특별히 토포사(討捕使)를 설치하여 적발하고 잡아들이게 하였습니다. …… 이것을 다스리는 방책은 적격자인 수령을 구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지난번 남원(南原)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박정(朴炡)이 부사가 되어 70~80인을 적발하여 죽인 덕택에 남원은 지금까지 무사합니다. 지금에 있어서는 별도의 조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수령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임기응변으로 힘껏 잡아들이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광주(廣州)·이천(利川)·충원(忠原)·여주(驪州) 같은 곳의 수령을 우선 가려 보내는 것이 급무일 것 같습니다.” 하니, …… 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여주·이천·충원 세 고을입니다. 전 목사 송흥주(宋興周)는 전에 충원 목사로 있었는데 그가 백성들에게 베푼 사랑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가 비록 식견은 없으나 재주와 국량은 취할 만합니다. 그리고 원주목사(原州牧使) 이배원(李培元)은 재주와 기량이 모두 넉넉하니, 흥주를 충원에 있게 하고 배원을 여주로 옮겨 보낸다면 적임자를 얻게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30, 인조 12년 12월 22일 갑진.
  • 1636년(인조 14):충원현감이 경기도 내의 도적들을 참수함
    • 내용 : 이보다 앞서, 경기 여주(驪州)·이천(利川)·죽산(竹山) 등지에서 기승을 부리는 도적들을 충원현감(忠原縣監) 이배원(李培元)이 계책을 세워 잡아서 참살했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일을 보고하자 가자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14, 인조 14년 4월 21일 을미.
  • 1639년(인조 17):익명서를 계문한 예조 참의 홍득일을 파직
    • 내용 : 이전에 영릉(英陵)의 정자각에 불이 났는데, 상이 수호군(守護軍)이 변을 일으켰다고 여겨, 중건할 때에 경기의 백성을 쓰지 말고 다만 수호군으로 하여금 그 역사를 담당하도록 하고 예조 참의 홍득일(洪得一)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자 수호군들이 원망하여 마지않다가 그 이튿날 새벽에 득일에게 몰래 언문(諺文)으로 투서하기를 “수호군 최경남(崔敬男)이 수악(首惡)이고 박응계(朴應戒)가 그 다음입니다.” 하였는데, 득일이 이 사실을 계문하였다. 의금부에서 삼성(三省)을 베풀어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최경남이 지레 죽었다. 양사에서 “익명서(匿名書)로 옥사를 구성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나니,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다시 조사하소서.” 하였다. 이에 경차관 심택(沈澤)이 수호군과 여주(驪州) 고을 사람들을 추문(推問)하니, 모두 “최경남·박응계 두 도적이 재랑(齋郞)에게 죄를 얻었는데, 그 앙갚음으로 변을 낸 것이 틀림없다.”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39, 인조 17년 8월 12일 정유.
  • 1640년(인조 18):여주 등에 기근이 들어 구제함
    • 내용 : 여주(驪州) 등 한강 상류 다섯 고을에 기근이 더욱 심하게 들었으므로 강화(江華)의 쌀 1천 석으로 나누어 진휼하게 하고 추수 때에 갚도록 하였다.
    • 출전 : 『仁祖實錄』 권40, 인조 18년 1월 21일 계묘..
  • 1640년(인조 18):이경여를 여주목사에 제수하기를 청함한 명을 거두지 않다
    • 내용 : 간원이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경여(李敬輿)는 다른 사람보다 재학(才學)이 뛰어나 평소에 명망이 있었는데, 지금 그의 사사로운 청으로 인하여 갑자기 외직에 제수하였습니다. 머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 출전 : 『仁祖實錄』 권40, 인조 18년 2월 12일 계해.
  • 1640년(인조 18):이목을 여주목사에 제수함
    • 내용 : 정치화(鄭致和)를 집의로, 김시번(金始蕃)을 교리로, 조경(趙絅)을 부응교로, 이상형(李尙馨)을 교리로, 신천익(愼天翊)·박종부(朴宗阜)를 수찬으로 삼았다. 특지로 이목(李楘)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출전 : 『仁祖實錄』 권40, 인조 18년 2월 19일 경오.
  • 1647년(인조 25):여주 일대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7월 2일에 경기의 부평(富平)·안산(安山)·김포(金浦) 등 여러 고을에 해일이 일어났고, 7월 27일에는 경기의 양주(楊州)·이천(利川)·여주(驪州)·양근(陽根)·지평(砥平) 등 여러 고을에 우박이 많이 내렸다.
    • 출전 : 『仁祖實錄』 권48, 인조 25년 8월 11일 기묘.
  • 1648년(인조 26):간원이 여주·제천 등의 수령을 잦은 체직으로 포흠이 많고 민폐가 심함을 아룀
    • 내용 : 간원이 아뢰기를, “여주(驪州)·제천(堤川)·충원(忠原)·해주(海州)·울진(蔚珍)·인동(仁同) 등의 고을은 10개월 이전에는 경솔히 체직을 허락하지 말아서 민폐를 제거하고 공기(公器)를 온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여주 등의 고을에 포흠(逋欠)된 것이 많았는데, 그 곳의 수령이 된 사람은 임기가 10개월이 지나게 되면 해유(解由)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여 피하였고 부임했다고 하더라도 10개월 되기 전에 체직되어 돌아가기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포흠은 갈수록 누적되었고 백성들은 영송(迎送)의 폐단을 견딜 수 없게 되었으므로 간원이 논한 것이다.
    • 출전 : 『仁祖實錄』 권49, 인조 26년 10월 14일 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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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